묘법연화경 시작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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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法蓮華經
불교경전. 7권 28품.
‘법화경’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으로, 불교전문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화엄경 華嚴經≫과 함께 한국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경은 예로부터 모든 경전들 중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여러 민족에게 애호되었던 이 경은 기원 전후에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서북 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2차에 걸쳐 증보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한역본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8권이 가장 널리 보급, 유통되었다.
28품으로 된 이 경은 그 전체가 귀중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한 품만을 특별히 다룰 만큼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이 관음신앙의 근거가 되어 특별히 존숭을 받아 왔고, 따로 ≪관음경 觀音經≫으로 편찬되어 많이 독송되었다.
또한 제11품 <견보탑품 見寶塔品>은 보살 집단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불탑숭배(佛塔崇拜)사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 다보탑과 석가탑 조성에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제15품 <종지용출품 從地涌出品>에서는 대지하(大地下)의 허공 속에 살고 있던 보살이 대지의 틈바구니에서 솟아오르듯이 나타나 허공에 서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광경을 오랫동안 표면에 나타나지 못하였던 보살집단이 강력한 세력으로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허공에 선다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입장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 교단에서 오직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만을 숭배하는 피상적 견해를 탈피하여, 무량한 생명의 상징인 불(佛)을 보려는 보살들의 깊은 성찰의 결과를 선언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제16품 <여래수량품 如來壽量品>은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부처를 체증(體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들의 새롭고 깊은 불타관(佛陀觀)이 반영되어 있다. 부처는 언제나 이 사바세계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성불(成佛)하게 한다는 지극한 이상이 담겨 있고, 이것이 우리 나라 법화신앙의 근거로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되고 전승된 것은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다. 삼승(三乘)이 결국은 일승(一乘)으로 귀일(歸一)한다는 이 사상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보살(菩薩)의 무리들에게 맞게끔 갖가지의 법(法)을 설하였지만, 그것이 모두 부처의 지견을 열어 보이고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시방불토(十方佛土)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사상(圓融無碍思想)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통적 귀일불교(會通的歸一佛敎)로 이끌었고, 한민족의 화사상(和思想)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제2품 <방편품 方便品>, 제3품 <비유품 臂喩品>, 제4품 <신해품 信解品>, 제5품 <약초유품 藥草喩品>, 제7품 <화성유품 化城喩品> 등에서 높은 문학성을 지닌 불타는 집의 비유, 방탕한 자식의 비유, 초목의 비유, 주정뱅이의 비유 등을 통하여 그러한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경의 유통을 위하여 간행된 판본은 불경 가운데서 가장 많은 횟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의 중요성과 함께 경전 간행의 영험에도 힘입은 바 크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한국인 찬술 주석서는 [표 1]과 같다.
[표 1] 妙法蓮華經韓國人註解書
≪법화경≫은 우리 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법화경≫이 언제부터 유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이 경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에 이에 대한 경흥(憬興)의 소(疏), 태현의 고적기(古迹記), 도륜(道倫)의 소, 원효(元曉)의 종요(宗要)와 방편품요간(方便品料簡), 의적(義寂)의 강목(綱目), 순경(順憬)의 요간(料簡) 등 신라인의 연구 주석서가 보이고 있다.
이로써 삼국시대부터 ≪법화경≫이 널리 유통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금자원(金字院)·은자원(銀字院) 등 사경 전문기관이 설치되어 금·은으로 대장경을 필사하기도 하였는데, 초기부터 ≪법화경≫에 대한 금니(金泥)·은니(銀泥)의 사경(寫經)도 성행하였다. 이 시대의 사경으로는 1275년(충렬왕 1)에 선린(禪隣)이 필사한 ≪법화경보문품 法華經普門品≫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법화경≫ 간행에 대한 기록은 1020년(현종 11)에는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반야경 大般若經≫과 함께 ≪법화경≫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에 김제 금산사에서 1083년에서 1097년 사이에 ≪법화현찬 法華玄贊≫ 등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백련사원묘국사중진탑비(白蓮寺圓妙國師中眞塔碑)에 국사가 ≪법화경≫을 천만 번 염송한 뒤 ≪법화경강요 法華經綱要≫를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간행한 ≪법화경≫의 발문에 보면 1340년 요원(了圓)이 편찬한 ≪법화영험전 法華靈驗傳≫이 만의사(萬儀寺)에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고종 때는 고종 자신이 ≪법화경≫을 숭상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법화경≫을 암송할 정도로 법화 공덕사상이 널리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간행본이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1236년에 정안에 의해서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몇 종에 지나지 않지만, ≪법화경≫ 간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으로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불교경전의 간행은 사찰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법화경≫ 간행은 경전 독송이나 교학 연구라기보다 경전신앙(經典信仰)에 의해 시주자들의 공덕을 위하여 간행된 경향이 짙다. 고려 때의 ≪법화경≫ 유통에 대한 공덕사상이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금은자(金銀字)의 법화경사경(法華經寫經)이 여러 번 이루어졌다.
세조 때는 간경도감이라는 국가기관을 설치하여 불교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 때 ≪법화경≫에 관한 것만도 3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판본을 살펴보면 정천익(鄭天益)의 시주로 1399년에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 사찰에서 간행한 것으로 간행 기록이 뚜렷한 것만도 117종이 전해 오고 있다.
이들 판본을 살펴보면 1행에 13자, 17자, 18자, 20자가 대부분이다. 이 중에서 20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성달생(成達生)이 필사한 1405년(태종 5) 안심사(安心寺) 간행본과 1445년(세종 27) 성달생·임효인(任孝仁)·조절(曺楶) 등이 공동으로 필사하여 간행한 것, 세조 연간에 황진손(黃振孫)이 필사로 간행한 것을 번각(飜刻)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법화경≫은 1236년에 간행된 ≪법화경≫과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송나라 계환(戒環)이 1126년(인종 4)에 저술한 ≪묘법연화경요해 妙法蓮華經要解≫ 7권본이다. ≪법화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로는 신라시대 고승들의 저술을 비롯하여 중국 역대 고승들의 저술이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이 중 계환의 주해가 우리 나라에서 크게 유통된 것은 그 내용이 한국불교의 흐름과 일치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이해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판본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3종이고, 조선시대의 것이 117종으로 모두 120종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법화경판은 34종 3,036장이다.
조선시대의 판본은 [표 2], 현존하는 법화경판은 [표 3]과 같다.
[표 2] 現存 妙法蓮華經 版本
[표 3] 現存妙法蓮華經經板
≪법화경≫은 우리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유통되었던 대승불교경전이며, 또한 같은 내용의 책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다. 1999년 12월 현재 지정된 ≪법화경≫은 [표 4]와 같고, 이외에 일괄 지정된 국보 제206호 해인사고려각판에 1종, 보물 제793호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에 5종, 보물 제959호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에 11종의 ≪법화경≫이 포함되어 있다.
[표 4] 妙法蓮華經 文化財指定
(1) 보물 제692호
1240년(고종 27)에 간행한 목판본. 2권(권7 複本) 2첩(帖). 이 판본은 권말에 의하면, 최이(崔怡)의 명으로 사일(四一)이 입수한 송나라 계환이 주해한 송본(宋本)에 의거하여 조판(雕板)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각이 정교하며 자체가 단정하다. 2첩 중 간기(刊記)를 잃은 판본은 판각 당시에 인출하여 불복(佛腹:불상의 뱃속)에 넣었던 듯 자획(字劃)에 마멸이 없고, 인쇄가 깨끗하며 지질도 두텁게 잘 뜬 저지(楮紙:닥종이)가 흰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정 당시의 소장자에 의하면, 황해도 황주군 정방산(正方山)성불사(成佛寺)의 불복에서 나온 것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 첩은 성불사의 불복에서 꺼낸 판본보다 오래된 것같이 보이나, 자획에 완결(刓缺:깨지거나 마모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법화경≫에 대한 계환의 주해본이 당시 우리 나라에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경기도 호암미술관과 서울의 최현이 소장하고 있다.
(2) 보물 제962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2권(권7) 1책.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첩장본 판식이나 선장으로 제본하였다. 권말에 ‘시주전진양판관김○○(施主前晉陽板官金○○)’·‘거창군부인유씨(居昌郡夫人劉氏)’ 등의 묵서지기(墨書識記)가 있어 이들의 시주에 의하여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977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1권(권7) 1첩.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말에 ‘시주공조전서최극수김남효도흥윤금환(施主工曹典書崔克壽金南孝道興潤金環)’의 묵서가 있어 고려 말경에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색(紺色) 표지에 ‘묘법연화경계환소권제칠(妙法蓮華經戒環疏卷第七)’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울의 이원기(李元基)가 소장하고 있다.
(4) 보물 제918호
1288년(충렬왕 14) 승려 재색(齋色)이 간행한 것이다. 1권(권7) 1첩. 이 판본은 본문이 매항 16자씩 배열되어 있고, 그 윗부분에는 과주(科註:문단을 나누어 주석을 붙임)를 달아 본문과 선(線)으로 연결되게 하여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불복에서 나온 듯 앞뒤 표지가 없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5) 보물 제960호
1382년(우왕 8)에 판각된 소자본(小字本) ≪법화경≫. 7권 2책. 이색(李穡)의 발문에 의하면, 계환이 주해한 구본(舊本)이 글씨가 커서 지선(志禪)이 다시 작은 글씨로 썼다고 하며, 수연군(壽延君)왕규(王珪)와 수령옹주(壽寧翁主) 왕씨(王氏) 등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권4∼권7이 후쇄본이고, 권1∼권3이 복각본이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6) 보물 제1081호
권1∼3,권4∼7. 7권 2책. 목판본. 1399년(정종 1)에 간행되었다. 권말에 있는 남재(南在)의 발문에 의하면 도인 해린(海隣)이 송나라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구해서 간행하기를 원하여, 중정대부사재령치사(中正大夫司宰令致仕) 정천익(鄭天益)과 전중훈대부군기감(前中訓大夫軍器監) 이양(李穰) 등의 시주로 간행한 것이다.
권머리에 학조(學祖)의 도장이 있어 조선 초기의 고승 학조가 소장했던 책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소자(小字)로 아주 정교하게 새긴 판본이다. 권1의 첫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 흠이고 다소 후쇄본(後刷本)이다. 서울의 송성문(宋成文)이 소장하고 있다.
(7) 보물 제968호
정확한 간행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1년(태종 1) 신총(信聰)이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조의 명으로 간행한 ≪수능엄경 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본문 글씨가 동일한 점과 간행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8) 보물 제961호
1405년(태종 5) 안심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권근(權近)의 발문에 의하면, 조계종 신희(信希) 등이 기로(耆老:노인)를 위해서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자(中字:큰 글씨)로 간행하기를 원하였는데, 성달생·성개(成槪)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추복(追福:사후에 명복을 빔)을 위하여 필사한 것을 신문(信文)이 안심사에 가지고 가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배장(包背裝:등지까지 함께 표지를 감싸는 것)의 청색명주로 된 표지가 남아 있고, 그 위에 ‘묘법연화경 권제사지칠(妙法蓮華經 卷第四之七)’이라는 제목이 주사(朱絲) 바탕에 금니(金泥)로 쓰여 있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9) 보물 제971호
1405년 안심사에서 간행한 보물 제961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머리에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정씨(鄭氏)라는 사람이 시주하여 새긴 커다란 변상도(21.7×79㎝)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원래 절첩본(折帖本:병풍식 제본)이었는데 포배장으로 개장(改裝)되어 있다. 서울의 이양재(李亮載)가 소장하고 있다.
(10) 보물 제766호
1448년(세종 30)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함께 발원하여 간행한 것이다. 권머리에는 변상도가 있고, 권말에 안평대군이 손수 써서 새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글씨를 정성껏 썼고 판각도 정교하며, 조선 초기의 명필가인 안평대군의 필적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1) 보물 제936호
1482년(성종 13)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외동딸인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1470년(성종 1)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하여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경전 중 하나이다. 2권 1책(複本). 책 끝에는 판각 때 쓴 김수온(金守溫)의 발문과 인출 당시 먹으로 쓴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이 붙어 있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2) 보물 제950호
1488년(성종 19)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그의 딸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찍어낸 14부 가운데 하나이다. 3권(권5∼7) 1책. 이 판본은 1470년에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해서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책 끝에 1488년에 을해자(乙亥字)로 찍은 발문이 있다. 보물 제936호와 같은 판본으로 왕실의 불교신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 보물 제101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법화경≫ 7권 가운데 권1·권3·권4·권5·권6의 5권 5책이다(권5·권6은 추가 지정됨).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4) 보물 제1107호
1451년(문종 1) 태종의 빈(嬪)인 명빈(明嬪) 김씨가 태종·세종·소헌왕후(昭憲王后)와 친정 아버지 안정공(安靖公)김구덕(金九德), 어머니 장경택주 신씨(莊敬宅主辛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3권(권5∼7). 서울의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5) 보물 제114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법화경≫ 가운데 1권(제3권) 2책으로 비록 전질은 아니나 교정인(校正印)이 있는 초쇄본(初刷本)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 본은 계환의 주해와 일여(一如)의 집주(集註)가 붙은 ≪법화경≫을 국역한 것인데 본문과 계환의 주해만 번역하였다. 서울의 송성문이 소장하고 있다.
(16) 보물 제1145호
이 판본은 권1(1帖)로 간기(刊記)가 있는 권책을 잃었으나, 본문의 글자체로 보아 1401년(태종 1)에 신총(信聰)이 태상왕 태조의 명을 받아 필사하여 판각한 ≪수능엄경 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동일한 서법(書法)의 판본이다. 이 판본은 책의 머리[卷首]를 변상도로 장식한 조선 초기의 독자적인 판본인 점에서 특히 이채롭다. 경기도의 박찬수(朴贊守)가 소장하고 있다.
(17) 보물 제1147호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가 둘째아들 예종이 돌아가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의경왕(懿敬王:德宗), 그리고 예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책이다. 5권(권3∼7) 2책. 이 판본은 당시 일류 각수(刻手)인 이영산(李永山)·장막동(張莫同)·최금동(崔今同) 등에 의해서 판각된 것으로 그 새김이 아주 정교하다. 이 판본은 초판본으로 이후에 찍은 후쇄본이 여러 종 전하고 있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18) 보물 제1153호
조선 세조 연간(1455∼1468)에 간행된 황진손(黃振孫)의 목판본. 3권(권1∼3) 1책. 책의 머리[卷首]에 변상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묘법연화경≫ 판본 가운데 성달생이 필사한 판본 계통과 구별되는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판본이다. 전주시의 한솔종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 보물 제1164호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후진(後秦) 구마라습의 한역본이다. 2권(권3∼4) 1책. 이 책은 간기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와 보물 제950호로 지정된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 윤씨(貞熹大王大妃尹氏)가 둘째아들 예종이 일찍이 죽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판각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그 후쇄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물 제950호의 1488년(성종 19) 후쇄본보다 인쇄상태가 양호하므로 그 이전인 성종 연간에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본문에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읽기 편리하게 되어 있고, 당시에 유행하던 계환의 주해가 붙어 있지 않아 독송용(讀誦用)으로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김민영(金敏榮)이 소장하고 있다.
(20) 보물 제1194호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신총이 필사하여 판각한 능엄경(보물 제1195호)과 서체가 동일한 판본이기에,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엽(全葉)을 6행(行)씩 나누어 첩장(帖裝)으로 제본하였다. 1권(권3) 1첩(帖).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1) 보물 1196호
1422년(세종 4)에 성령대군(誠寧大君:태종의 넷째 아들)과 그의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를 위하여 인순부윤(仁順府尹) 성억(成抑)이 새긴 목판에서 1456년(세조 1)에 동궁(東宮:德宗)의 빈(嬪)인 한씨(韓氏:昭惠王后)가 친정 어머니인 홍씨(洪氏:韓確의 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7권 7책의 완질본으로 표지 일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제첨(題簽:제목이 쓰여진 종이를 표지에 붙임)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썼으며, 각 책의 권수마다 변상도가 들어 있다. 글씨는 성달생 형제가 썼다. 비록 초간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판본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완질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2) 보물 제1225호
권말(卷末)의 갑인소자(甲寅小字)로 된 김수온의 발문에 의하면, 이 판본은 1463년(세조 9)에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목판에서 인수대비가 세조(世祖), 예종(睿宗), 의경왕과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72년(성종 3)에 찍어낸 29종의 불경 가운데 하나이다. ≪법화경≫이 간경도감판(刊經都監版)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귀중한 판본이다.
권 제7. 1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인수대비가 인출한 불경 가운데서도 ≪법화경≫은 간경도감판이었고, 이 때 인출한 60부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중앙승가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23) 보물 제1240호
이 판본은 전 7권 중 권 제3∼4의 영본(零本:책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남은 몇 권의 책)이고 간기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 제950호와 비교해 볼 때 동일한 판본이다. 이 판본은 구두를 나타내는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독해하기 편하도록 하였다. 제첨에 이르기까지 책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지질이나 인쇄상태도 매우 깨끗하다.
이 판본은 표지와 제첨이 원장(原裝) 때의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포배장인 장정은 우리 나라 장정사(裝幀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이지관, 보련각, 1973)
『불전해설』(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 출판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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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1990 지정편-(박상국, 문화재관리국, 1991)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 -1991 지정편-(문화재관리국, 1992)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1992∼1993 지정편-(문화재관리국, 1994)
불교경전. 7권 28품.
‘법화경’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전으로, 불교전문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화엄경 華嚴經≫과 함께 한국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경은 예로부터 모든 경전들 중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여러 민족에게 애호되었던 이 경은 기원 전후에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서북 인도에서 최초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2차에 걸쳐 증보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한역본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8권이 가장 널리 보급, 유통되었다.
28품으로 된 이 경은 그 전체가 귀중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어서 어느 한 품만을 특별히 다룰 만큼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 觀世音菩薩普門品>이 관음신앙의 근거가 되어 특별히 존숭을 받아 왔고, 따로 ≪관음경 觀音經≫으로 편찬되어 많이 독송되었다.
또한 제11품 <견보탑품 見寶塔品>은 보살 집단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불탑숭배(佛塔崇拜)사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 다보탑과 석가탑 조성에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제15품 <종지용출품 從地涌出品>에서는 대지하(大地下)의 허공 속에 살고 있던 보살이 대지의 틈바구니에서 솟아오르듯이 나타나 허공에 서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 광경을 오랫동안 표면에 나타나지 못하였던 보살집단이 강력한 세력으로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허공에 선다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입장에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적 교단에서 오직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불만을 숭배하는 피상적 견해를 탈피하여, 무량한 생명의 상징인 불(佛)을 보려는 보살들의 깊은 성찰의 결과를 선언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 제16품 <여래수량품 如來壽量品>은 영원한 생명, 근원적인 생명으로서의 부처를 체증(體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들의 새롭고 깊은 불타관(佛陀觀)이 반영되어 있다. 부처는 언제나 이 사바세계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성불(成佛)하게 한다는 지극한 이상이 담겨 있고, 이것이 우리 나라 법화신앙의 근거로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평가되고 전승된 것은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이다. 삼승(三乘)이 결국은 일승(一乘)으로 귀일(歸一)한다는 이 사상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보살(菩薩)의 무리들에게 맞게끔 갖가지의 법(法)을 설하였지만, 그것이 모두 부처의 지견을 열어 보이고 깨달음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시방불토(十方佛土)에는 오직 일불승(一佛乘)의 법만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사상(圓融無碍思想)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그대로 꽃을 피워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통적 귀일불교(會通的歸一佛敎)로 이끌었고, 한민족의 화사상(和思想)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회삼귀일사상은 제2품 <방편품 方便品>, 제3품 <비유품 臂喩品>, 제4품 <신해품 信解品>, 제5품 <약초유품 藥草喩品>, 제7품 <화성유품 化城喩品> 등에서 높은 문학성을 지닌 불타는 집의 비유, 방탕한 자식의 비유, 초목의 비유, 주정뱅이의 비유 등을 통하여 그러한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경의 유통을 위하여 간행된 판본은 불경 가운데서 가장 많은 횟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의 중요성과 함께 경전 간행의 영험에도 힘입은 바 크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한국인 찬술 주석서는 [표 1]과 같다.
[표 1] 妙法蓮華經韓國人註解書
≪법화경≫은 우리 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법화경≫이 언제부터 유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이 경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의천(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에 이에 대한 경흥(憬興)의 소(疏), 태현의 고적기(古迹記), 도륜(道倫)의 소, 원효(元曉)의 종요(宗要)와 방편품요간(方便品料簡), 의적(義寂)의 강목(綱目), 순경(順憬)의 요간(料簡) 등 신라인의 연구 주석서가 보이고 있다.
이로써 삼국시대부터 ≪법화경≫이 널리 유통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금자원(金字院)·은자원(銀字院) 등 사경 전문기관이 설치되어 금·은으로 대장경을 필사하기도 하였는데, 초기부터 ≪법화경≫에 대한 금니(金泥)·은니(銀泥)의 사경(寫經)도 성행하였다. 이 시대의 사경으로는 1275년(충렬왕 1)에 선린(禪隣)이 필사한 ≪법화경보문품 法華經普門品≫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법화경≫ 간행에 대한 기록은 1020년(현종 11)에는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반야경 大般若經≫과 함께 ≪법화경≫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에 김제 금산사에서 1083년에서 1097년 사이에 ≪법화현찬 法華玄贊≫ 등을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백련사원묘국사중진탑비(白蓮寺圓妙國師中眞塔碑)에 국사가 ≪법화경≫을 천만 번 염송한 뒤 ≪법화경강요 法華經綱要≫를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간행한 ≪법화경≫의 발문에 보면 1340년 요원(了圓)이 편찬한 ≪법화영험전 法華靈驗傳≫이 만의사(萬儀寺)에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고종 때는 고종 자신이 ≪법화경≫을 숭상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법화경≫을 암송할 정도로 법화 공덕사상이 널리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간행본이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은 1236년에 정안에 의해서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몇 종에 지나지 않지만, ≪법화경≫ 간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으로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불교경전의 간행은 사찰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법화경≫ 간행은 경전 독송이나 교학 연구라기보다 경전신앙(經典信仰)에 의해 시주자들의 공덕을 위하여 간행된 경향이 짙다. 고려 때의 ≪법화경≫ 유통에 대한 공덕사상이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금은자(金銀字)의 법화경사경(法華經寫經)이 여러 번 이루어졌다.
세조 때는 간경도감이라는 국가기관을 설치하여 불교경전을 간행하였는데, 이 때 ≪법화경≫에 관한 것만도 3종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판본을 살펴보면 정천익(鄭天益)의 시주로 1399년에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 사찰에서 간행한 것으로 간행 기록이 뚜렷한 것만도 117종이 전해 오고 있다.
이들 판본을 살펴보면 1행에 13자, 17자, 18자, 20자가 대부분이다. 이 중에서 20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성달생(成達生)이 필사한 1405년(태종 5) 안심사(安心寺) 간행본과 1445년(세종 27) 성달생·임효인(任孝仁)·조절(曺楶) 등이 공동으로 필사하여 간행한 것, 세조 연간에 황진손(黃振孫)이 필사로 간행한 것을 번각(飜刻)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법화경≫은 1236년에 간행된 ≪법화경≫과 1467년(세조 13)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송나라 계환(戒環)이 1126년(인종 4)에 저술한 ≪묘법연화경요해 妙法蓮華經要解≫ 7권본이다. ≪법화경≫에 대한 연구 주석서로는 신라시대 고승들의 저술을 비롯하여 중국 역대 고승들의 저술이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이 중 계환의 주해가 우리 나라에서 크게 유통된 것은 그 내용이 한국불교의 흐름과 일치하고 문장이 간결하며 이해가 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판본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3종이고, 조선시대의 것이 117종으로 모두 120종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법화경판은 34종 3,036장이다.
조선시대의 판본은 [표 2], 현존하는 법화경판은 [표 3]과 같다.
[표 2] 現存 妙法蓮華經 版本
[표 3] 現存妙法蓮華經經板
≪법화경≫은 우리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유통되었던 대승불교경전이며, 또한 같은 내용의 책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다. 1999년 12월 현재 지정된 ≪법화경≫은 [표 4]와 같고, 이외에 일괄 지정된 국보 제206호 해인사고려각판에 1종, 보물 제793호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유물에 5종, 보물 제959호 기림사비로자나불복장전적에 11종의 ≪법화경≫이 포함되어 있다.
[표 4] 妙法蓮華經 文化財指定
(1) 보물 제692호
1240년(고종 27)에 간행한 목판본. 2권(권7 複本) 2첩(帖). 이 판본은 권말에 의하면, 최이(崔怡)의 명으로 사일(四一)이 입수한 송나라 계환이 주해한 송본(宋本)에 의거하여 조판(雕板)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각이 정교하며 자체가 단정하다. 2첩 중 간기(刊記)를 잃은 판본은 판각 당시에 인출하여 불복(佛腹:불상의 뱃속)에 넣었던 듯 자획(字劃)에 마멸이 없고, 인쇄가 깨끗하며 지질도 두텁게 잘 뜬 저지(楮紙:닥종이)가 흰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정 당시의 소장자에 의하면, 황해도 황주군 정방산(正方山)성불사(成佛寺)의 불복에서 나온 것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 첩은 성불사의 불복에서 꺼낸 판본보다 오래된 것같이 보이나, 자획에 완결(刓缺:깨지거나 마모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쇄본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법화경≫에 대한 계환의 주해본이 당시 우리 나라에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려 주는 자료이다. 경기도 호암미술관과 서울의 최현이 소장하고 있다.
(2) 보물 제962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2권(권7) 1책.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첩장본 판식이나 선장으로 제본하였다. 권말에 ‘시주전진양판관김○○(施主前晉陽板官金○○)’·‘거창군부인유씨(居昌郡夫人劉氏)’ 등의 묵서지기(墨書識記)가 있어 이들의 시주에 의하여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977호
1240년에 간행한 목판본. 1권(권7) 1첩. 보물 제692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말에 ‘시주공조전서최극수김남효도흥윤금환(施主工曹典書崔克壽金南孝道興潤金環)’의 묵서가 있어 고려 말경에 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색(紺色) 표지에 ‘묘법연화경계환소권제칠(妙法蓮華經戒環疏卷第七)’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울의 이원기(李元基)가 소장하고 있다.
(4) 보물 제918호
1288년(충렬왕 14) 승려 재색(齋色)이 간행한 것이다. 1권(권7) 1첩. 이 판본은 본문이 매항 16자씩 배열되어 있고, 그 윗부분에는 과주(科註:문단을 나누어 주석을 붙임)를 달아 본문과 선(線)으로 연결되게 하여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불복에서 나온 듯 앞뒤 표지가 없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5) 보물 제960호
1382년(우왕 8)에 판각된 소자본(小字本) ≪법화경≫. 7권 2책. 이색(李穡)의 발문에 의하면, 계환이 주해한 구본(舊本)이 글씨가 커서 지선(志禪)이 다시 작은 글씨로 썼다고 하며, 수연군(壽延君)왕규(王珪)와 수령옹주(壽寧翁主) 왕씨(王氏) 등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권4∼권7이 후쇄본이고, 권1∼권3이 복각본이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6) 보물 제1081호
권1∼3,권4∼7. 7권 2책. 목판본. 1399년(정종 1)에 간행되었다. 권말에 있는 남재(南在)의 발문에 의하면 도인 해린(海隣)이 송나라 계환(戒環)의 주해본(註解本)을 구해서 간행하기를 원하여, 중정대부사재령치사(中正大夫司宰令致仕) 정천익(鄭天益)과 전중훈대부군기감(前中訓大夫軍器監) 이양(李穰) 등의 시주로 간행한 것이다.
권머리에 학조(學祖)의 도장이 있어 조선 초기의 고승 학조가 소장했던 책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소자(小字)로 아주 정교하게 새긴 판본이다. 권1의 첫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 흠이고 다소 후쇄본(後刷本)이다. 서울의 송성문(宋成文)이 소장하고 있다.
(7) 보물 제968호
정확한 간행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1년(태종 1) 신총(信聰)이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조의 명으로 간행한 ≪수능엄경 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본문 글씨가 동일한 점과 간행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8) 보물 제961호
1405년(태종 5) 안심사에서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권근(權近)의 발문에 의하면, 조계종 신희(信希) 등이 기로(耆老:노인)를 위해서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자(中字:큰 글씨)로 간행하기를 원하였는데, 성달생·성개(成槪)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추복(追福:사후에 명복을 빔)을 위하여 필사한 것을 신문(信文)이 안심사에 가지고 가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배장(包背裝:등지까지 함께 표지를 감싸는 것)의 청색명주로 된 표지가 남아 있고, 그 위에 ‘묘법연화경 권제사지칠(妙法蓮華經 卷第四之七)’이라는 제목이 주사(朱絲) 바탕에 금니(金泥)로 쓰여 있다. 서울의 이경희가 소장하고 있다.
(9) 보물 제971호
1405년 안심사에서 간행한 보물 제961호와 동일한 판본이다. 권머리에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정씨(鄭氏)라는 사람이 시주하여 새긴 커다란 변상도(21.7×79㎝)가 붙어 있다. 이 책은 원래 절첩본(折帖本:병풍식 제본)이었는데 포배장으로 개장(改裝)되어 있다. 서울의 이양재(李亮載)가 소장하고 있다.
(10) 보물 제766호
1448년(세종 30)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함께 발원하여 간행한 것이다. 권머리에는 변상도가 있고, 권말에 안평대군이 손수 써서 새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글씨를 정성껏 썼고 판각도 정교하며, 조선 초기의 명필가인 안평대군의 필적이 잘 나타나 있다.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1) 보물 제936호
1482년(성종 13)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외동딸인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1470년(성종 1)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하여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경전 중 하나이다. 2권 1책(複本). 책 끝에는 판각 때 쓴 김수온(金守溫)의 발문과 인출 당시 먹으로 쓴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이 붙어 있다. 경기도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2) 보물 제950호
1488년(성종 19)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그의 딸 순숙공주(順淑公主)의 천도를 위하여 찍어낸 14부 가운데 하나이다. 3권(권5∼7) 1책. 이 판본은 1470년에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에 의해서 판각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책 끝에 1488년에 을해자(乙亥字)로 찍은 발문이 있다. 보물 제936호와 같은 판본으로 왕실의 불교신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 보물 제101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법화경≫ 7권 가운데 권1·권3·권4·권5·권6의 5권 5책이다(권5·권6은 추가 지정됨). 서울의 강태영(姜泰泳)이 소장하고 있다.
(14) 보물 제1107호
1451년(문종 1) 태종의 빈(嬪)인 명빈(明嬪) 김씨가 태종·세종·소헌왕후(昭憲王后)와 친정 아버지 안정공(安靖公)김구덕(金九德), 어머니 장경택주 신씨(莊敬宅主辛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3권(권5∼7). 서울의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5) 보물 제1140호
1463년(세조 9)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법화경≫ 가운데 1권(제3권) 2책으로 비록 전질은 아니나 교정인(校正印)이 있는 초쇄본(初刷本)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 본은 계환의 주해와 일여(一如)의 집주(集註)가 붙은 ≪법화경≫을 국역한 것인데 본문과 계환의 주해만 번역하였다. 서울의 송성문이 소장하고 있다.
(16) 보물 제1145호
이 판본은 권1(1帖)로 간기(刊記)가 있는 권책을 잃었으나, 본문의 글자체로 보아 1401년(태종 1)에 신총(信聰)이 태상왕 태조의 명을 받아 필사하여 판각한 ≪수능엄경 首楞嚴經≫(보물 제759호)과 동일한 서법(書法)의 판본이다. 이 판본은 책의 머리[卷首]를 변상도로 장식한 조선 초기의 독자적인 판본인 점에서 특히 이채롭다. 경기도의 박찬수(朴贊守)가 소장하고 있다.
(17) 보물 제1147호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가 둘째아들 예종이 돌아가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의경왕(懿敬王:德宗), 그리고 예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책이다. 5권(권3∼7) 2책. 이 판본은 당시 일류 각수(刻手)인 이영산(李永山)·장막동(張莫同)·최금동(崔今同) 등에 의해서 판각된 것으로 그 새김이 아주 정교하다. 이 판본은 초판본으로 이후에 찍은 후쇄본이 여러 종 전하고 있다. 서울의 강태영이 소장하고 있다.
(18) 보물 제1153호
조선 세조 연간(1455∼1468)에 간행된 황진손(黃振孫)의 목판본. 3권(권1∼3) 1책. 책의 머리[卷首]에 변상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묘법연화경≫ 판본 가운데 성달생이 필사한 판본 계통과 구별되는 조선시대의 독자적인 판본이다. 전주시의 한솔종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 보물 제1164호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유통된 후진(後秦) 구마라습의 한역본이다. 2권(권3∼4) 1책. 이 책은 간기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와 보물 제950호로 지정된 판본과 비교하여 보면 동일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 윤씨(貞熹大王大妃尹氏)가 둘째아들 예종이 일찍이 죽자 이미 고인이 된 세조와 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판각한 목판에서 찍어낸 후쇄본이다.
그 후쇄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물 제950호의 1488년(성종 19) 후쇄본보다 인쇄상태가 양호하므로 그 이전인 성종 연간에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본은 본문에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읽기 편리하게 되어 있고, 당시에 유행하던 계환의 주해가 붙어 있지 않아 독송용(讀誦用)으로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김민영(金敏榮)이 소장하고 있다.
(20) 보물 제1194호
간기가 없어 정확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신총이 필사하여 판각한 능엄경(보물 제1195호)과 서체가 동일한 판본이기에,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엽(全葉)을 6행(行)씩 나누어 첩장(帖裝)으로 제본하였다. 1권(권3) 1첩(帖).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1) 보물 1196호
1422년(세종 4)에 성령대군(誠寧大君:태종의 넷째 아들)과 그의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를 위하여 인순부윤(仁順府尹) 성억(成抑)이 새긴 목판에서 1456년(세조 1)에 동궁(東宮:德宗)의 빈(嬪)인 한씨(韓氏:昭惠王后)가 친정 어머니인 홍씨(洪氏:韓確의 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7권 7책의 완질본으로 표지 일부가 약간 훼손되었을 뿐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제첨(題簽:제목이 쓰여진 종이를 표지에 붙임)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썼으며, 각 책의 권수마다 변상도가 들어 있다. 글씨는 성달생 형제가 썼다. 비록 초간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판본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완질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22) 보물 제1225호
권말(卷末)의 갑인소자(甲寅小字)로 된 김수온의 발문에 의하면, 이 판본은 1463년(세조 9)에 간경도감에서 판각한 목판에서 인수대비가 세조(世祖), 예종(睿宗), 의경왕과 인성대군(仁城大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72년(성종 3)에 찍어낸 29종의 불경 가운데 하나이다. ≪법화경≫이 간경도감판(刊經都監版)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귀중한 판본이다.
권 제7. 1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인수대비가 인출한 불경 가운데서도 ≪법화경≫은 간경도감판이었고, 이 때 인출한 60부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중앙승가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23) 보물 제1240호
이 판본은 전 7권 중 권 제3∼4의 영본(零本:책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남은 몇 권의 책)이고 간기가 없으나 보물 제936호, 제950호와 비교해 볼 때 동일한 판본이다. 이 판본은 구두를 나타내는 둥근 표점이 새겨져 있어 독해하기 편하도록 하였다. 제첨에 이르기까지 책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지질이나 인쇄상태도 매우 깨끗하다.
이 판본은 표지와 제첨이 원장(原裝) 때의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포배장인 장정은 우리 나라 장정사(裝幀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이지관, 보련각, 1973)
『불전해설』(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 출판부, 1978)
『국보』 12-서예·전적-(천혜봉 편, 예경산업사, 1985)
『동산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1990 지정편-(박상국, 문화재관리국, 1991)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 -1991 지정편-(문화재관리국, 1992)
『동산문화재지정보고서』-1992∼1993 지정편-(문화재관리국,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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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야 11시간 36분전 1 -
츰부다라니654
츰부 츰부 츰츰부 아가셔츰부 바결랍츰부 암발랍츰부 비라츰부 발졀랍츰부 아루가츰부 담뭐츰부살…
위리야 11시간 50분전 1 -
약사여래불진언294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위리야 11시간 50분전 1 -
금강진언645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
위리야 11시간 51분전 1 -
신묘장구대다라니296
신묘장구대다라니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위리야 11시간 52분전 1 -
아난존자의 일기-2권
업에 따라서 즐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고통스러운 느낌이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
위리야 2024-12-17 15:52 14 -
츰부다라니653
츰부 츰부 츰츰부 아가셔츰부 바결랍츰부 암발랍츰부 비라츰부 발졀랍츰부 아루가츰부 담뭐츰부살…
위리야 2024-12-17 15:45 15 -
약사여래불진언293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위리야 2024-12-17 15:44 15 -
금강진언644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
위리야 2024-12-17 15:44 13 -
신묘장구대다라니295
신묘장구대다라니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위리야 2024-12-17 15:4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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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전보살님 드뎌 발원하셨군요 위리야88 2023-04-1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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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처에 걸려들지 않으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위리야 2020-06-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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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법문 감사합니다. 위리야 2020-05-1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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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또 가야죠꽃 멀미를 하러 츠얼츠얼 내려가렵니다. 처멸 2020-02-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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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 신용카드로 공중전화를 정말 대단합니다. 처멸 2020-02-0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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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귀일심원 요익중생 상구보리하화중생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겠습니다. 위리야 2020-01-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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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속도속에 시간을 건져가며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건만,그렇게 살아가시는 님이 계시… 향원 2019-12-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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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연이 되는것이겠지요~ 부처님 말씀이 이세상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단비가 되어 삶의 무… 향원 2019-09-13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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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분이 다가오는 구랴 보살님아 위리야 2018-06-1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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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시간도 조금 밖에 안걸리는데 왜이리 인연 닿기 힘들까요?우리는 … 위리야 2018-03-0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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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 2015-04-16 23:14신해품석존께서 희망넘친 설법하실때 장로들은 목이메여 감격하였고 사리불이 성불수기 받음보고서…
위리야 2017-07-10 00:21부처님께서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 대비구승 오백 인은 모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으나, 오…
정미 2015-04-21 09:35妙法蓮華經불교경전. 7권 28품.‘법화경’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천태종(天台宗)의 근본 경…
smchang 2015-04-18 14:44칸차나브리 공동체를 만들고자 시작합니다.일단은 태국 칸차나브리 반야사로 시작 공동체로 나아…
smchang 2019-10-13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