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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닦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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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2   2017.06.1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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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닦는 남자

김지수 문화부장    
김지수 문화부장
▲ 김지수 문화부장
도쿄 아오야마에는 브리프트 애시라는 구두 손질 바(Bar)가 있습니다. 사장인 하세가와 유야 씨는 젊은 시절, 구두닦이가 구두를 윤이 나게 손질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구두 닦는 데 인생을 걸었습니다. 가죽 구두 수십켤레를 전자레인지에 돌려보고, 쪄보고, 구워보는 등 실험을 거듭해 자기만의 구두 손질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터득한 그 비법을 ‘구두 손질의 노하우'라는 책에 담아냈는데, 그 문장의 태도가 참으로 간결하고 멋이 있습니다. 저는 중년의 구두닦이가 쓴 이 책의 분위기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예컨대 주어가 생략된 채로 ‘스타킹으로 닦는다. 왁스와 물로 광택을 낸다. 확실히 말린다' 등의 소박한 문장에 말이지요. 조금 과장하자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오후에 탈영병을 베었다. 또 베었다. 방안에 오래 앉아 있었다"라고 적은 글을 보고 소설가 김훈이 탄복했던 것과 같은 심정이었달까요.

오래 칼을 다룬 무인의 글에 허튼 감정이 없듯, 오래 구두를 닦은 장인의 글은 마침표와 마침표를 잇는 엉성한 접속사가 없었습니다. 활자와 활자 사이는 노동의 활기로 충만하더군요.

‘얼룩을 적셔 희미하게 만든다, 남은 얼룩은 다시 물로 적신다'같이 묵은 때를 벗겨내는 요령을 읽을 땐, ‘구두 손질의 노하우'가 한편의 ‘생활 시집’처럼 느껴졌습니다. 구둣솔과 검은 왁스, 흰 헝겊은 화공의 연장처럼 수려해보이기만 했지요.

도쿄에 있는 구두 손질 바 브리프트 애시에는, 종종 중년 남자들이 20대부터 신던 구두를 들고 와서 이렇게 말한답니다. “이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 보내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는 마음을 담아서요." 저는 자신의 젊은 날을 이보다 더 애틋하게 대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아버지도 젊은 시절, 구두닦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이곤 했습니다. 신문지에 불을 붙여 가죽에 불침을 먹이고 침과 물을 고루 발라 광을 내는 그 모습은 일종의 제의처럼 신성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늘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가 어떤 일에 그토록 열중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 전엔 영화 ‘특별시민'에서 보니 배우 곽도원도 구두를 정성껏 손질하더군요. 영화 속에서 그는 권력에 취한 부패한 정치 참모인데, 구두를 닦을 때만큼은 제정신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자기가 신는 구두를 손질하는 것 만으로 이토록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니…! 그것이 혀나 귀나 눈의 호사가 아니라 발이라는 데 진정성은 배가됩니다. 무릎을 꿇고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타자를 섬기는 극상의 행위이듯, 쪼그리고 앉아 내 구두를 닦는 것은 나를 향한 진정한 공손이 아니겠습니까(놀랍게도 구두가 빨아들이는 땀의 양이 하루에 반 컵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 저는 ‘취향'을 거들먹거리는 많은 중년 신사들을 만나왔습니다. 예컨대, 시가바에서 좋은 수트를 입고 위스키의 향을 음미하거나, 그날의 날씨에 따라 오디오를 바꿔듣는 까다로운 수집광들… 하지만 21세기 르네상스맨이라 자처하는 그들보다 인문학 강의 하듯 구두 손질을 ‘열강'하는 유야 씨에게서 비상한 위엄을 감지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더니, 역시나 단순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너무 하찮아서 쓸데없다고 여기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태도. 오랜 세월, 자기만의 의례를 지키는 모습이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구두에 슈크림을 바르면 가죽에 영양을 공급해 부드러워진다.
▲ 구두에 슈크림을 바르면 가죽에 영양을 공급해 부드러워진다.
얼마 전 저는 매달 17억원을 번다는 건물주의 일상을 읽고 놀랐습니다. 아침에 골프 치고, 호텔에서 점심 먹고 사우나 하고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한 후, 건물관리인의 보고를 받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 조물주보다 위대하다는 건물주에겐 미안한 말씀이지만, 이렇게 지루할 수가!

제 보기엔 매달 17억원을 버는 건물주의 호화로운 나날보다 가끔씩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자기 구두를 닦는 삶이 훨씬 우아해보입니다.

사실 이 칼럼은 ‘마흔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한 주제를 담으려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두닦는 얘기만 하고 말았습니다.

중년 연구자들의 결과에 의하면 인간이 생의 전구간에 걸쳐 느끼는 행복감은 U자 곡선을 그리는데, 40~50대는 이 U자 곡선의 바닥 부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자녀를 부양하고 노부모를 돌보는 데다 직장에서도 무거운 책임을 맡습니다. 덕분에 휴식과 운동은 부족하고 칼로리 섭취는 높지요. 그래서 중년 남자들이 기를 쓰고 내기 골프를 치고, 악을 쓰며 비싼 오디오를 사는가 봅니다.

웬 오지랖인가 싶지만,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에 너무 지쳐있는 분들에게, 이번 주말부터 구두를 닦아보길 권합니다. 하찮아서 쓸데없다고 여기는 일에 정성을 들이다보면, 문득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거나, 중년 이후 가장 중요한 능력은 아무래도 회복탄력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

그리하여 우리가 닥쳐오는 시련을 인정하되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는 현실적 낙천주의자가 되려면 정기적으로 내 구두의 먼지를 털고 광을 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PS 구두를 손질하는 법은 여자들이 화장하는 법과 비슷합니다. 때를 닦아내고 수분과 유분을 보충한 다음 멋을 내는 거지요.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9/2017060901119.html?main_col#csidx361198b60d3bd80b4bcfbdc32d97e39 onebyone.gif?action_id=361198b60d3bd80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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