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스님의 한국학에세이 시즌2]<22>심원 김형효의 철학과 선(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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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는 우리 마음을 혁명하는 게 급선무”
좌선도 많이 했던 실참 수행자
그가 도달한 철학의 종착지는
‘마음’, 소유가 아닌 ‘존재’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깊이 있는 철학은 바로 불교”
불제자에게도 큰 이정표 돼
2016년 봄날, 성남 분당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앞의 한 까페에서 김형효 선생과 함께 한담을 나누던 모습.
선생의 마지막 강의를 듣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는 스승 복이 많았던 것 같다. 선친께 어릴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20대에 대학에서 좋은 교수님들 밑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익혔다. 출가하여 혜암선사의 수행 가풍을 훈습했고, 탄허선사를 사숙하여 교학의 기틀을 다졌으며, 진제선사께 공부를 점검받으며 선(禪)의 안목을 길렀다. 많은 어른 스님들과 각계각층의 선생님들이 나의 소중한 공부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며, 수행이 진척될 수 있도록 도와준 자상한 선각자(先覺者)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있으니, 출가한 뒤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 대학원에서 만난 심원(心遠) 김형효(1940~2018) 선생이다. 현대 한국철학계의 커다란 획을 그은 지성으로 서양철학에서 시작하여 동양철학을 두루 관통한 뒤 불교에까지 방대한 사유의 영역을 펼친 분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크나큰 행운으로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한형조 선생의 스승이니 절 집안의 설명방식을 잠시 빌자면 나에게는 노스님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 동서와 고금의 철학을 관통하고 나서 던져준 불교와 관련된 그의 직관과 통찰은 5주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깊은 여운을 내뿜고 있다.
따라 읽기 대상에서 현실 만남으로
나는 출가 전 대학 시절에 서양철학사를 일별한 바 있었다. 철학반이라는 학회에 몸담으면서 동서 철학을 두루 보았는데 철학과의 전공 수업을 5과목 이상 찾아 들을 만큼 철학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강렬했다. 그중에서도 ‘생철학’이라 불리던 베르그송의 ‘생명의 비약(lan vital)’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고, 이를 <중용(中庸)>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비교하면서 내심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만난 책이 바로 민음사에서 출간된 김형효 선생의 <베르그송의 철학>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나온 서양철학 개론서들은 어색한 번역과 난삽한 용어들의 나열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일과 프랑스 철학의 복잡성을 한번 투과하고 현학적인 언어들을 자유롭게 구사해야 철학공부를 좀 해본 것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생의 저서를 읽으면 그 철학자의 사상을 완전히 소화한 뒤 자신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선생의 책을 따라 읽다가 <데리다의 해체철학>까지 보고 출가를 했고, 10여 년이 지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직접 선생을 뵙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생애 마지막 대학원 강의에서 선생은 평생 철학자로서 걸어온 학문의 여정을 회고했다. 어린 시절 겪은 6·25전쟁 이야기에서부터 유럽에서의 유학 시절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만난 불교에 관한 내용까지 선생의 마지막 강의는 마치 순수 무구한 천진불(天眞佛)의 해맑은 제요(提要)와도 같은 것이었다.
총림에서 큰스님을 시봉해 보고 도인 스님들을 참방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선생이 그 스님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심도인(無心道人)의 마음자리를 갖춘 어른임이 틀림없었다.
하이데거 철학을 불교를 통해 설명
마지막에 뵈었던 소탈하고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선생의 저서들은 매우 광활하고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고 있다. 탄허스님이 유불선 3교를 회통하고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해석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면, 김형효 선생의 사유와 저술은 서양을 관통(貫通)하고 귀거래(歸去來)하여 그 안목으로 동양사상과 한국학을 총섭(總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을 해부한 안목을 바탕으로 하여 노장사상을 데리다의 해체철학으로 분석하고, 하이데거의 사상을 불교로 설명한 저술은 탁월한 안목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줬다.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을 유식(唯識)으로 푼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과 후기사상을 화엄(華嚴)으로 설명한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는 한국에서 진정한 동서 철학의 회통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불어에 더 능통했던 선생이 독일어로 된 하이데거의 저술을 읽다 보니 모르는 단어가 가끔 나와서 독일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책을 다시 읽었다는 일화에서처럼 선생은 하이데거에 진심이었다. 특히 서양철학자 가운데 불교에 가장 깊이 접근하고 이해했던 인물이 하이데거라는 선생의 언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직관을 바탕으로 불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 그는 매주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 나와서 유식학 강의를 들었다. 노구를 이끌고 불교 공부에 매진한 뒤 내린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깊이 있는 철학은 바로 불교’라는 그의 평생의 결론은 불제자인 나에게도 큰 이정표가 되었다.
선정(禪定)에서 나온 저술들
선생은 많은 책을 선정(禪定) 속에서 쓴 듯하다. 당신의 체험들을 나에게 수차례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끝에 “이런 것이 선사(禪師)들이 말하는 선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고 했었다. 책을 집필할 때에 집중이 될 때면 며칠 밤낮이 지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바깥세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책 한 권을 며칠 만에 단박에 쓴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들을 들어보니 참선해서 깊이 들어갈 때 만나는 일여(一如)의 과정과 삼매(三昧)의 순간과 대체로 일치했으며,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상황들을 정확히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형효 선생을 단순한 세간의 학자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이자 선사(禪師)였다. 불교를 깊이 공부했고, 좌선도 많이 했던 실참 수행자였다. 그가 도달한 철학의 종착지는 ‘마음’이었고 소유가 아닌 존재였다.
소유에서 존재로, 물질에서 마음으로
제1회 원효학술상을 수상한 <원효의 대승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선생은 원효의 사상을 1400년 전의 낡은 철학도 아니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설한 설법에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인류의 본원적 질문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성찰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국 정신의 정수라고 재해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 혁명>이라는 책에서는 ‘소유’에 매몰된 대가로 각종 정신질환에 노출된 역풍을 겪고 있는 현대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산업혁명이나 사회혁명을 넘어선 ‘존재’의 ‘마음 혁명’을 요청했다. ‘본능’이 아니라 ‘본성’으로 돌아가야 하며 세상을 혁명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혁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존재론적 혁명의 정점에 선(禪)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불교가 모든 사상의 관면(冠冕)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선악이 끊어진 세계 갈망한 애국자
선생은 소유의 철학은 자아(自我)의 철학이요, 존재의 철학은 무아(無我)의 철학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선악 시비의 분별과 과도한 도덕주의의 잣대로 서로 싸우고 있다며 이를 심히 걱정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흑백과 명암이 공존하지만, 상대를 죄악시하는 이분법과 분별심을 넘어선 원효의 화쟁사상이 우리의 근본정신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탄허스님이 계룡산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으니 함께 계룡산 일대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응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어느 국군의 날 계룡산 안에 위치한 900만 평이나 되는 계룡대를 함께 방문했다. 탄허 미래학의 본고장이 바로 이곳으로 산태극, 수태극의 천하명당 신도안(新都案) 터가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더니 “한국의 명운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든다”며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내가 만났던 심원 선생은 세간사보다는 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근원에 더 긴밀하게 줄이 닿아있는 순수본연의 인격체였다. 어느 한 전생에 깊은 암자에서 함께 모시고 참선 정진했던 노스님을 이생에 다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선생을 생각하면 손자의 살을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던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련히 떠오른다.
[불교신문 3746호/2022년12월13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좌선도 많이 했던 실참 수행자
그가 도달한 철학의 종착지는
‘마음’, 소유가 아닌 ‘존재’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깊이 있는 철학은 바로 불교”
불제자에게도 큰 이정표 돼
2016년 봄날, 성남 분당에 위치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앞의 한 까페에서 김형효 선생과 함께 한담을 나누던 모습.
선생의 마지막 강의를 듣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는 스승 복이 많았던 것 같다. 선친께 어릴 때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20대에 대학에서 좋은 교수님들 밑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익혔다. 출가하여 혜암선사의 수행 가풍을 훈습했고, 탄허선사를 사숙하여 교학의 기틀을 다졌으며, 진제선사께 공부를 점검받으며 선(禪)의 안목을 길렀다. 많은 어른 스님들과 각계각층의 선생님들이 나의 소중한 공부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며, 수행이 진척될 수 있도록 도와준 자상한 선각자(先覺者)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있으니, 출가한 뒤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 대학원에서 만난 심원(心遠) 김형효(1940~2018) 선생이다. 현대 한국철학계의 커다란 획을 그은 지성으로 서양철학에서 시작하여 동양철학을 두루 관통한 뒤 불교에까지 방대한 사유의 영역을 펼친 분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크나큰 행운으로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한형조 선생의 스승이니 절 집안의 설명방식을 잠시 빌자면 나에게는 노스님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 동서와 고금의 철학을 관통하고 나서 던져준 불교와 관련된 그의 직관과 통찰은 5주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깊은 여운을 내뿜고 있다.
따라 읽기 대상에서 현실 만남으로
나는 출가 전 대학 시절에 서양철학사를 일별한 바 있었다. 철학반이라는 학회에 몸담으면서 동서 철학을 두루 보았는데 철학과의 전공 수업을 5과목 이상 찾아 들을 만큼 철학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강렬했다. 그중에서도 ‘생철학’이라 불리던 베르그송의 ‘생명의 비약(lan vital)’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고, 이를 <중용(中庸)>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비교하면서 내심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만난 책이 바로 민음사에서 출간된 김형효 선생의 <베르그송의 철학>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나온 서양철학 개론서들은 어색한 번역과 난삽한 용어들의 나열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일과 프랑스 철학의 복잡성을 한번 투과하고 현학적인 언어들을 자유롭게 구사해야 철학공부를 좀 해본 것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생의 저서를 읽으면 그 철학자의 사상을 완전히 소화한 뒤 자신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선생의 책을 따라 읽다가 <데리다의 해체철학>까지 보고 출가를 했고, 10여 년이 지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직접 선생을 뵙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생애 마지막 대학원 강의에서 선생은 평생 철학자로서 걸어온 학문의 여정을 회고했다. 어린 시절 겪은 6·25전쟁 이야기에서부터 유럽에서의 유학 시절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만난 불교에 관한 내용까지 선생의 마지막 강의는 마치 순수 무구한 천진불(天眞佛)의 해맑은 제요(提要)와도 같은 것이었다.
총림에서 큰스님을 시봉해 보고 도인 스님들을 참방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선생이 그 스님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심도인(無心道人)의 마음자리를 갖춘 어른임이 틀림없었다.
하이데거 철학을 불교를 통해 설명
마지막에 뵈었던 소탈하고 단순한 모습과는 달리 선생의 저서들은 매우 광활하고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고 있다. 탄허스님이 유불선 3교를 회통하고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해석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면, 김형효 선생의 사유와 저술은 서양을 관통(貫通)하고 귀거래(歸去來)하여 그 안목으로 동양사상과 한국학을 총섭(總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양철학을 해부한 안목을 바탕으로 하여 노장사상을 데리다의 해체철학으로 분석하고, 하이데거의 사상을 불교로 설명한 저술은 탁월한 안목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줬다.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을 유식(唯識)으로 푼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과 후기사상을 화엄(華嚴)으로 설명한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는 한국에서 진정한 동서 철학의 회통이 이루어졌음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불어에 더 능통했던 선생이 독일어로 된 하이데거의 저술을 읽다 보니 모르는 단어가 가끔 나와서 독일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책을 다시 읽었다는 일화에서처럼 선생은 하이데거에 진심이었다. 특히 서양철학자 가운데 불교에 가장 깊이 접근하고 이해했던 인물이 하이데거라는 선생의 언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직관을 바탕으로 불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 그는 매주 서울 개포동 금강선원에 나와서 유식학 강의를 들었다. 노구를 이끌고 불교 공부에 매진한 뒤 내린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깊이 있는 철학은 바로 불교’라는 그의 평생의 결론은 불제자인 나에게도 큰 이정표가 되었다.
선정(禪定)에서 나온 저술들
선생은 많은 책을 선정(禪定) 속에서 쓴 듯하다. 당신의 체험들을 나에게 수차례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끝에 “이런 것이 선사(禪師)들이 말하는 선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고 했었다. 책을 집필할 때에 집중이 될 때면 며칠 밤낮이 지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바깥세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책 한 권을 며칠 만에 단박에 쓴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들을 들어보니 참선해서 깊이 들어갈 때 만나는 일여(一如)의 과정과 삼매(三昧)의 순간과 대체로 일치했으며,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상황들을 정확히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형효 선생을 단순한 세간의 학자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이자 선사(禪師)였다. 불교를 깊이 공부했고, 좌선도 많이 했던 실참 수행자였다. 그가 도달한 철학의 종착지는 ‘마음’이었고 소유가 아닌 존재였다.
소유에서 존재로, 물질에서 마음으로
제1회 원효학술상을 수상한 <원효의 대승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선생은 원효의 사상을 1400년 전의 낡은 철학도 아니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설한 설법에 그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인류의 본원적 질문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성찰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한국 정신의 정수라고 재해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 혁명>이라는 책에서는 ‘소유’에 매몰된 대가로 각종 정신질환에 노출된 역풍을 겪고 있는 현대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산업혁명이나 사회혁명을 넘어선 ‘존재’의 ‘마음 혁명’을 요청했다. ‘본능’이 아니라 ‘본성’으로 돌아가야 하며 세상을 혁명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혁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존재론적 혁명의 정점에 선(禪)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불교가 모든 사상의 관면(冠冕)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선악이 끊어진 세계 갈망한 애국자
선생은 소유의 철학은 자아(自我)의 철학이요, 존재의 철학은 무아(無我)의 철학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선악 시비의 분별과 과도한 도덕주의의 잣대로 서로 싸우고 있다며 이를 심히 걱정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흑백과 명암이 공존하지만, 상대를 죄악시하는 이분법과 분별심을 넘어선 원효의 화쟁사상이 우리의 근본정신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탄허스님이 계룡산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으니 함께 계룡산 일대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응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어느 국군의 날 계룡산 안에 위치한 900만 평이나 되는 계룡대를 함께 방문했다. 탄허 미래학의 본고장이 바로 이곳으로 산태극, 수태극의 천하명당 신도안(新都案) 터가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더니 “한국의 명운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든다”며 환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내가 만났던 심원 선생은 세간사보다는 존재의 본질과 인간의 근원에 더 긴밀하게 줄이 닿아있는 순수본연의 인격체였다. 어느 한 전생에 깊은 암자에서 함께 모시고 참선 정진했던 노스님을 이생에 다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선생을 생각하면 손자의 살을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던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련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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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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