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을 펼쳐 수행을 읽다. 7나를 들여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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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2 2019.05.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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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들여다봄
計功多小 量彼來處
忖己德行 全缺應供
防心離過 貪等爲宗
正思良藥 爲療形枯
爲成道業 應受此食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오관게(五觀偈, 불교에서 공양할 때 외우는 다섯 구의 게송)
옷감을 덧대어 기워 입고, 물건을 끝의 끝까지 아껴 써가며, 쌀 한통 허투루 버리지 않고 어려웠던 못 먹고 못 살던 가난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다.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채 버려지는 물건들이 쌓여가고 있으며, 젓가락질 한번 닿지도 않은 음식들이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소비를 위한 명분을 가진 과잉생산시대이다. 아니다. 어쩌면 쓰레기 생산의 시대인 것이다. 이는 특히 식(食)문화에 두드러져 보인다.
풍요로운 음식생산은 사람들의 창의성에 힘입어 새롭고 다양한 신 메뉴들이 개발되고 소비된다. ‘식도락’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음식소비’를 권하고 있는 추세이다. TV를 틀어도 맛집에 먹방에 ‘음식탐방기’이다. 외국인도 ‘먹방’이라는 단어를 알고 정확하게 사용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음식소비 콘텐츠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유명하다. 바야흐로 식량소비의 시대인 것이다.
많은 수요에 힘입어 생산된 음식들은 입맛에 대한 기호와 자극적인 맛에 호평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과잉생산과 짧은 유통기한 때문에라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해 음식물쓰레기로 처분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난으로 인해 늘 굶주리던 시절 물 한 대접으로 배고픔을 달래던 이야기는 기억에서 조차 흐릿해졌으며,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먼 옛날의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음식이 흘러넘치는 풍요시대에 잘 적응하여 먹는 행위를 충실히 실천하여 건장한 체격을 넘어서는 풍채를 지닌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관리 부적격자’ 혹은 ‘비만인’이라는 부정적 시선을 보낸다. 참 이율배반적 사고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후덕’이나 ‘인격’이라는 미명으로 ‘풍만함’을 인정받았던 일들은 더 이상 없다. 이 역시 다른 의미의 전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비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다. 현대 의학계는 인류가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병의 원인을 비만으로 천명하며, ‘비만’을 병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규정지었다. 이를 근거로 온갖 매체에서는 인류의 적인 ‘비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해결방안을 쏟아내고 있으며, 개인과 회사들도 저마다 자기들이 효과를 보았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비만과 식이조절이 일상이 되었다.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수치에서는 비만 인구의 증가라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비만’을 배척하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은 또다시 힘든 길을 선택한다. 비만을 피하기 위한 운동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각종의 건강보조식품들을 먹고 있다. 먹으니 병이 되고 병이 되니 또 고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웃기는 상황이 쳇바퀴 돌 듯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악순환인 것이다.
악화일로의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사람들은 ‘비만’은 나쁘다. 혹은 ‘아름답지 않다’, ‘게으르다’의 미추(美醜) 혹은 선악(善惡)의 개념이 첨가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극단의 선택을 하는 악순환의 기로에 위태롭게 서있게 되었다. 즉 과하게 음식을 섭취하거나 거부하는 양극단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나는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 즉 ‘비만’ 혹은 ‘미추(美醜)’ 혹은 ‘선악(善惡)’이라는 가치에 치우쳐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닌 몸이라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현상과 개념이라는 양 극단 중 어디쯤에 치우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로 몸과 마음은 하나 된 수행의 도구다. 하여 몸과 마음의 두 개체를 살펴 조화롭게 정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가치’와 ‘개념’이라는 마음에 치우쳐 신체적 현상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에 대한 가치의 영향 없이 내 몸과 마음을 객관화하여 수행과 삶을 올바르게 운용할 수 있을까?
『중용(中庸)』에서 언급된 ‘극단을 잘 이해하고 운용하는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지향할 바를 고민해 보자.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提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였구나!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좋아했으며, 악은 숨기고 선을 드러내었고, 일의 양쪽 극단을 잘 이해한 다음 그 중을 대중에게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순임금이 그토록 존경받는 인물이 된 이유가 아니겠는가!”
『중용(中庸)』 제6장 中
중국 순임금은 일(事)의 양 극단(極端)을 잘 이해한 후 그 중간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의 원인과 내포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순리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중용(中庸)』의 미덕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념과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원칙(道)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부처님 역시 출가 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하는 극단적 고행수행을 하셨다. 이 수행은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림으로써 정신의 정화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수행법이다. 6년 동안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정신마저 희미해져 수행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육체를 의식적으로 괴롭힌 다는 것은 그만큼 육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육체에 관심을 두기보다 차라리 마음을 고요히 바르게 가누는 수행이 오히려 육체의 정화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의 의문을 갖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추스르고 네란자라 강물에 내려와 몸을 씻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으신 후 ‘육체와 깨달음’이라는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관(觀)하시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깨달음을 얻으셨다.
부처님이 고행의 과정에서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듯이, 몸은 오직 이 생을 잘 지내기 위한 수행의 도구이며 깨달음의 완성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고정 관념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온전히 몸이라는 도구를 원활하게 운용하여 현재의 삶을 행복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네들은 정작 중요한 내 몸에 대한 관(觀)은 시도하지 않은 채, 다양한 미적 개념을 입혀 우리 몸을 괴롭히고 있다.
내 몸을 제대로 관찰해 본 적은 언제인가? 나의 호흡을 제대로 지각한 적은 있었나? 지금 나의 몸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살펴본 적이 있던가?
나의 몸은 이렇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번은 봤을 법한 둥근 얼굴에 먹으면 먹는 대로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솔직하게 표현해대는 몸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외관상으로 드러나 있는 몸매만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호흡을 가지고 숨을 쉬고 있는가? 나는 과연 사물을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음식을 대하며 주로 내가 섭취하는 음식이 내 몸에서 어떤 소화를 거쳐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을까? 남들이 얘기해주는 상식적인 내용들 말고 내 몸의 건강상태를 각 기관별로 집중해가며 느껴본 적은 있는가? 관(觀)을 통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수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정직한 몸에 극단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미추의 판단할 수 있을까? 본성을 지키고 수행해 나가는 도구인 우리의 몸을 가치관을 내포한 개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몸에 대해 생각하고 그 판단이 옳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에 나의 소중한 몸을 맡겨버려 쉽게 극단적 기준을 잣대로 판단해 버린 것은 아닌가?
우리가 부처님과 순임금이 되는 것은 어떠한가? 세간에 만연해있는 미추(美醜)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 도(道)를 이루게 도와주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편견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추와 방편의 양 극을 잘 이해한 후, 나의 상태에 맞는 중도(中道)를 찾아 자성을 지닌 소중한 우리 몸을 가꾸어 나가보도록 변화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일반적 시선으로부터 나부터 자유로워져 조금씩 변화해나간다면 ‘아름다움’이나 ‘비만’이라는 극단의 가치에 얽매여 몸을 괴롭히던 사회의 풍조가 조금씩 바뀌어 질 것이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수행의 도구이자 수행의 결정체인 몸이 바로설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알기는 첫걸음은 내 몸을 바로 아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計功多小 量彼來處
忖己德行 全缺應供
防心離過 貪等爲宗
正思良藥 爲療形枯
爲成道業 應受此食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오관게(五觀偈, 불교에서 공양할 때 외우는 다섯 구의 게송)
옷감을 덧대어 기워 입고, 물건을 끝의 끝까지 아껴 써가며, 쌀 한통 허투루 버리지 않고 어려웠던 못 먹고 못 살던 가난의 시대가 저문 지 오래다.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채 버려지는 물건들이 쌓여가고 있으며, 젓가락질 한번 닿지도 않은 음식들이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소비를 위한 명분을 가진 과잉생산시대이다. 아니다. 어쩌면 쓰레기 생산의 시대인 것이다. 이는 특히 식(食)문화에 두드러져 보인다.
풍요로운 음식생산은 사람들의 창의성에 힘입어 새롭고 다양한 신 메뉴들이 개발되고 소비된다. ‘식도락’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음식소비’를 권하고 있는 추세이다. TV를 틀어도 맛집에 먹방에 ‘음식탐방기’이다. 외국인도 ‘먹방’이라는 단어를 알고 정확하게 사용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음식소비 콘텐츠는 인터넷 세상에서도 유명하다. 바야흐로 식량소비의 시대인 것이다.
많은 수요에 힘입어 생산된 음식들은 입맛에 대한 기호와 자극적인 맛에 호평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과잉생산과 짧은 유통기한 때문에라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해 음식물쓰레기로 처분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난으로 인해 늘 굶주리던 시절 물 한 대접으로 배고픔을 달래던 이야기는 기억에서 조차 흐릿해졌으며,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먼 옛날의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음식이 흘러넘치는 풍요시대에 잘 적응하여 먹는 행위를 충실히 실천하여 건장한 체격을 넘어서는 풍채를 지닌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관리 부적격자’ 혹은 ‘비만인’이라는 부정적 시선을 보낸다. 참 이율배반적 사고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후덕’이나 ‘인격’이라는 미명으로 ‘풍만함’을 인정받았던 일들은 더 이상 없다. 이 역시 다른 의미의 전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비만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다. 현대 의학계는 인류가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병의 원인을 비만으로 천명하며, ‘비만’을 병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규정지었다. 이를 근거로 온갖 매체에서는 인류의 적인 ‘비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해결방안을 쏟아내고 있으며, 개인과 회사들도 저마다 자기들이 효과를 보았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비만과 식이조절이 일상이 되었다.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수치에서는 비만 인구의 증가라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비만’을 배척하며,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은 또다시 힘든 길을 선택한다. 비만을 피하기 위한 운동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각종의 건강보조식품들을 먹고 있다. 먹으니 병이 되고 병이 되니 또 고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웃기는 상황이 쳇바퀴 돌 듯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악순환인 것이다.
악화일로의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사람들은 ‘비만’은 나쁘다. 혹은 ‘아름답지 않다’, ‘게으르다’의 미추(美醜) 혹은 선악(善惡)의 개념이 첨가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극단의 선택을 하는 악순환의 기로에 위태롭게 서있게 되었다. 즉 과하게 음식을 섭취하거나 거부하는 양극단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나는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 즉 ‘비만’ 혹은 ‘미추(美醜)’ 혹은 ‘선악(善惡)’이라는 가치에 치우쳐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닌 몸이라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현상과 개념이라는 양 극단 중 어디쯤에 치우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로 몸과 마음은 하나 된 수행의 도구다. 하여 몸과 마음의 두 개체를 살펴 조화롭게 정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가치’와 ‘개념’이라는 마음에 치우쳐 신체적 현상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에 대한 가치의 영향 없이 내 몸과 마음을 객관화하여 수행과 삶을 올바르게 운용할 수 있을까?
『중용(中庸)』에서 언급된 ‘극단을 잘 이해하고 운용하는 방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지향할 바를 고민해 보자.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提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였구나!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좋아했으며, 악은 숨기고 선을 드러내었고, 일의 양쪽 극단을 잘 이해한 다음 그 중을 대중에게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순임금이 그토록 존경받는 인물이 된 이유가 아니겠는가!”
『중용(中庸)』 제6장 中
중국 순임금은 일(事)의 양 극단(極端)을 잘 이해한 후 그 중간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의 원인과 내포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순리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중용(中庸)』의 미덕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념과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원칙(道)에 맞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부처님 역시 출가 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하는 극단적 고행수행을 하셨다. 이 수행은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어버림으로써 정신의 정화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수행법이다. 6년 동안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정신마저 희미해져 수행을 계속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육체를 의식적으로 괴롭힌 다는 것은 그만큼 육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육체에 관심을 두기보다 차라리 마음을 고요히 바르게 가누는 수행이 오히려 육체의 정화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의 의문을 갖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추스르고 네란자라 강물에 내려와 몸을 씻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으신 후 ‘육체와 깨달음’이라는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관(觀)하시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깨달음을 얻으셨다.
부처님이 고행의 과정에서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듯이, 몸은 오직 이 생을 잘 지내기 위한 수행의 도구이며 깨달음의 완성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고정 관념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온전히 몸이라는 도구를 원활하게 운용하여 현재의 삶을 행복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네들은 정작 중요한 내 몸에 대한 관(觀)은 시도하지 않은 채, 다양한 미적 개념을 입혀 우리 몸을 괴롭히고 있다.
내 몸을 제대로 관찰해 본 적은 언제인가? 나의 호흡을 제대로 지각한 적은 있었나? 지금 나의 몸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살펴본 적이 있던가?
나의 몸은 이렇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번은 봤을 법한 둥근 얼굴에 먹으면 먹는 대로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솔직하게 표현해대는 몸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외관상으로 드러나 있는 몸매만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호흡을 가지고 숨을 쉬고 있는가? 나는 과연 사물을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음식을 대하며 주로 내가 섭취하는 음식이 내 몸에서 어떤 소화를 거쳐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을까? 남들이 얘기해주는 상식적인 내용들 말고 내 몸의 건강상태를 각 기관별로 집중해가며 느껴본 적은 있는가? 관(觀)을 통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수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정직한 몸에 극단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미추의 판단할 수 있을까? 본성을 지키고 수행해 나가는 도구인 우리의 몸을 가치관을 내포한 개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몸에 대해 생각하고 그 판단이 옳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에 나의 소중한 몸을 맡겨버려 쉽게 극단적 기준을 잣대로 판단해 버린 것은 아닌가?
우리가 부처님과 순임금이 되는 것은 어떠한가? 세간에 만연해있는 미추(美醜)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 도(道)를 이루게 도와주는 방편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편견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추와 방편의 양 극을 잘 이해한 후, 나의 상태에 맞는 중도(中道)를 찾아 자성을 지닌 소중한 우리 몸을 가꾸어 나가보도록 변화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일반적 시선으로부터 나부터 자유로워져 조금씩 변화해나간다면 ‘아름다움’이나 ‘비만’이라는 극단의 가치에 얽매여 몸을 괴롭히던 사회의 풍조가 조금씩 바뀌어 질 것이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수행의 도구이자 수행의 결정체인 몸이 바로설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알기는 첫걸음은 내 몸을 바로 아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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