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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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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   2021.01.1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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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디자이너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71년 1월11일. “패션계의 여왕 가다”
5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한 패션 디자이너의 부고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이름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바로 명품 패션 브랜드 ‘샤넬’을 만든 그 ‘샤넬’이죠. 기사는 “10일 밤 87세의 그 여인(샤넬)이 리츠(샤넬이 지낸 프랑스 파리의 유명 호텔) 호텔 특실에서 평화롭게 숨졌다”면서 “피카소, 장 콕토 그리고 소련의 유명한 안무가 디아질레프와 어울리던 프랑스 의상계의 귀엽고 고집센 여왕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샤넬’은 지금도 ‘루이비통’, ‘에르메스’와 함께 세계 3대 명품 패션 브랜드로 꼽힙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소개하는 건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디자이너로도 유명합니다. 

샤넬이 패션계에 발을 들인 1910년대의 여성 패션은 중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큰 모자,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고 거추장스러운 치마,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 등이 대표적이었죠, 특히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여성의 흉부와 허리를 압박하는 코르셋은 여성들을 호흡곤란으로 기절시키거나 뼈와 장기를 손상시키기도 했는데요. 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었지만 여성들은 일터에서조차 이런 복장을 해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샤넬은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패션을 선보입니다. 치마를 무릎까지 올리고, 재킷에는 주머니를 달고, 남성복에 쓰이던 소재와 색상을 여성복에 도입했습니다.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여성용 바지도 만들었고요. 이같은 패션은 당시 여성 학자, 사업가, 운동선수 등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지 않는 실용적 디자인의 ‘블랙 드레스’를 고안해 코르셋을 거부했습니다. 코르셋을 없앤 최초의 여성복은 아니었지만 유행을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끈 건 이 드레스가 처음이었습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이 드레스는 훗날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에 의해 계승돼 배우 오드리 햅번이 영화<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 입었던 ‘리틀 블랙 드레스’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 역시 여느 여성들과는 달랐습니다. 빈민가에서 자라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를 여읜 그는 12살 때 수녀원에 딸린 보육원에 맡겨집니다.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수녀가 되는 대신 18세 때 보육원을 나와 낮에는 의상실 재봉사로, 밤에는 술집 가수로 일했습니다. 이때 그가 부른 노래 이름을 따 ‘코코’라는 별명이 생겼고, 훗날 ‘코코 샤넬’의 ‘코코’가 됐다네요. 이후 ‘샤넬 모드’라는 모자가게를 시작으로 여성복을 만들기 시작했고, 샤넬N0.5로 대표되는 향수, 보석·악세사리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직원이 4000명에 달하는 대기업 ‘샤넬’을 키워냅니다. 

기사에 소개된 것처럼 그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 극작가 장 콕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사업가 아서 카펠 등 많은 남성들과 연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기존의 관습을 부수는 혁명적인 디자인, 당대의 일반 여성들과는 달랐던 삶 등은 이후 미국 등지에서 그가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인식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향인 프랑스와 유럽에서는 평가가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습니다. 실제 지난 2016년 그가 2차 대전 당시 독입 첩보기관 ‘압베어’의 공작원이었음을 시사하는 비밀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종전 후 스위스로 망명해야했고, 10년 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1939년 당시 ‘샤넬’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서자 그는 점포 대다수를 폐업하면서까지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했습니다. 1954년 재기하기 전까지 15년 간 프랑스 패션계를 떠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혐오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그가 나치의 스파이로 활동한 이유 중 하나도 유대인을 혐오해 나치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유대인 동업자로부터 샤넬 향수의 판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 ‘탈코르셋’의 상징인 그이지만 성공을 위해서 남성들의 도움을 이용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를 패션계와 사교계로 이끈 에티엔느 발상, 그에게 사업 수완을 알려주고 ‘샤넬 모드’ 창업 자금을 지원한 아서 카펠, 그에게 큰 부를 안겨준 샤넬 향수를 만든 에르네스트 보, 나치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으로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공작, 70년대 ‘샤넬’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이끈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등이 대표적이죠. 다만 샤넬 역시 나이가 들어서는 당대의 젊은 남성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각에선 그를 ‘알려진 것과 실제의 간극이 큰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그의 생애를 ‘아이러니한 삶’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허락된 것이 적었던 시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말처럼 “자신의 삶을 창조했”던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또 ‘현대 여성복의 시초’라고 평가받는 그의 스타일은 당대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여성성을 제시했습니다. “여성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나이를 갖는다”는 그의 말처럼요.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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