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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펼쳐 수행을 읽다4 봉숭아 꽃물에서 습(習)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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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   2019.04.2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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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갈래 욕망이 그늘 지우는
환희의 골짜기를 통해서 무안을 당한 세월이
강으로 흐르는 그 날부터
손을 땅을 보는 버릇이 생겼나 보다.
대개는 다섯으로도 남는 손가락.
손을 펴고 오무릴 때마다
꽃은 수없이 피었다 졌다….
창문은 수없이 닫쳐선 열렸다.
시․고원, 손

 기차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옆자리에 앉은 소녀의 손톱이 봉숭아 빛 고운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여름이면 봉숭아꽃으로 물들이는 풍습이 떠올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가는 길에 그 소녀와 신변 잡담을 주고받던 중 손톱이 곱다고 얘기해주니 크게 웃으며, 엄마가 놀이삼아 치료 삼아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었단다. ‘치료 삼아’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 또한 재미있었다.

 소녀에게는 어릴 적부터 손톱이 자라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성장하여도 그 버릇이 영 고쳐지지 않았더란다. 어릴 적에는 손톱에 쓰디쓴 약도 발라보고 손톱을 바짝 깎아보는 방법도 써보았지만 영 나아지지 않았고 이제는 다 큰 숙녀의 손톱을 어찌할 수 없어 걱정이 더해졌다고 한다. 차라리 손톱을 단장하자는 역발상을 내어 치료방편으로 봉숭아 꽃물을 들여 주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심했으면 저런 방법을 썼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 ‘묘안이 아닐 수 없다’하며 감탄했었다.

 사람은 자라며 저마다 몸에 물든 습관이나 버릇이 있다. 어떤 이는 공부를 하기 전에 꼭 책상을 말끔히 정리해야 하고, 또 다른 이는 습관적으로 수건을 네 귀퉁이를 꼭 맞추어 걸거나 치약을 끝부터 쓰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 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처럼 다양한 습관들은 제 주인의 몸에 붙어 평생을 따라 다닌다.

 내 몸에 베어 있는 습관이 바른 것이라면 그지없이 좋지만, 대개는 고치고 싶은 혹은 버리고 싶은 것들이다. 그런데 고치고 싶은 습관들은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 괴롭힌다.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습관은 습(習)과 관(慣)의 낱낱의 한자가 합쳐진 말이다. 습(習)은 ‘익히다’의 뜻으로 삶의 환경이나 생활, 의식에서 비롯되어 부지불식간에 내 생각과 판단, 행동의 일부로 젖어들어, 내 욕망과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관(慣)또한 ‘버릇’이라는 의미로서 ‘관성(慣性)’의 의미가 강하다.

 이는 마치, 한 번 ‘구르다’라는 행동을 한 자동차가 일정 속도가 지나면 제어장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갑자기 멈추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한 번 했던 ‘관성적’ 행동이 몸에 붙으면 제어나 저항력 혹은 반발적 조건이 나타나도 갑자기 멈추거나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의식적으로 행해진 행동들은 버릇이 아니나, 어느 순간 저절로 행해지는 것들은 이미 관성이 붙어 제어장치 없이는 멈출 수 없는 것이 된다.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다.

 알다시피 불가에서는 윤회의 생을 통해 습(習)은 연결되어있고 현생의 건강과 삶,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당장에 좋은 공덕과 수행을 실천하며 쌓기를 권한다.
처음부터 좋은 습관을 들이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우리네 삶은 늘 반대여서 고치고 싶은 버릇들을 두고 스스로와 싸움을 한다. 나쁜 습관의 주체인 나를 끝없이 괴롭힌다.

 내게 좋은 습관은 왜 처음부터 생기지 않을까? 왜 바른 행동들은 습관이 되기 어려운 것일까? 그 이유는 머리로는 바르고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하고 싶지 안아하는 무의식적 습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좋은 습관을 갖기 어렵다. 또한 윤회의 시선으로 보자면, 세세(世世)에 쌓여 있던 과거의 습을 현세의 정신이 통제하지 못하여 몸이 말하고 행하는 것이 구습(舊習)을 답습하게 된 원인이 있다. 그렇다고 이에 선습(善習)을 만드는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부지런함, 정직, 성실, 기부, 선행 등의 행동들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은 희생이나 용기 혹은 현상에서의 손해라는 부담이 함께 온다. 또한 우리는 희생이나 어려움을 겪고 싶지 않다. 그저 ‘누워서 떡 먹고’싶어 할 만큼 무위도식을 기대한다. 누군가의 덕을 보며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힘들게 고생하고 싶지 않고, 아프고 싶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고(四苦) 팔고(八苦)에서 벗어나고는 싶지만 수행하는 노력은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습관은 우리네에게는 어렵고 먼 남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습성에 대해 『중용(中庸)』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은 지극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이가 드물구나!”
『중용(中庸)』 제3장 中

 좋은 행동, 좋은 습관인 줄 알지만 필부들은 업(業)과 연(緣)에 의해 몸에 익히고 꾸준히 실행하기 어렵다. 어렵고 힘들다 해서 혹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성향이라고 치부해버리면서 좋은 습관들이기(선근 쌓기)를 아주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정도(正道)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미담이 면면히 계속 전해지는 것과 같이 사람은 늘 선(善)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인류의 미래는 희망적인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선을 지향하여 개선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하여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실패의 경험을 거울삼아 다양한 시도를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새해맞이 목표세우기가 그러하다. 목표를 세우고 과학적 근거를 동원해서 실천방법을 체계적으로 기록한다. 실패를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경비를 지출하기도 한다. 과감한 투자와 체계적인 설계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늘 미비하여 올해의 목표가 내년의 목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행히도 연속된 좌절 속에도 계속 바꾸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시도에 지쳐 시들어진 의지에 다시 열정을 쏟아줄 방법을 고민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몸에 베인 습관을 효과적으로 고치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은 사실 지극히 의도적인 변화이다. 고치고 싶고 버리고 싶은 습관들일수록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 이는 원래 즐거움에 반하는 행동들이기에 뇌가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내적 갈등이 폭발하고, 성공에의 고비가 발생하며, 내게 좌절을 안겨준다. 합리적이나 의도적인 변화방법은 힘든 과정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미비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습관을 고치려는 마음을 객관화하여 ‘착하다’며 다독여주고 위로해보자. 또한 순리에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근원적 고침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을 바꾼 학생처럼 나쁜 행동을 혼내지 않는 대신 예쁘거나 좋아하는 대체행위를 찾아내는 방향전환으로 습관을 바꾼 것처럼 말이다.

 혹은 뇌의 판단에 앞서 몸이 먼저 행동하도록 길들여 놓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 수식(數息)을 하며 호흡을 하거나 일정한 곳에 생각을 묶어놓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지관(止觀)과 같은 방법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이 내포되지 않은 수(數)에 의지하며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방법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습관을 들이기는 쉽다.
다만 주의할 점은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즉 완벽주의와 조바심을 경계해야 한다. 처음부터 실천이 어려운 높은 목표를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기본과 융통성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조금씩 꾸준히 변화를 이루어 가도록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
108배를 꾸준히 하는 습관을 갖고자하는 목표를 세우는 예를 들어 보자. 보통은 절을 하기 위해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할 것이다. 그런데 숫자에 얽매여 무릎이 아픈 환자가 숫자에 얽매여 처음부터 108배를 하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상태에 맞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조금씩 서서히 절의 양을 늘려가야 한다. 이를 몸에 베일 때까지 하루 일주일 열흘 백일 천일 등 단계별 실천기간을 두고 정진한다면 반드시 절을 하는 수행의 습관이 몸에 베일 것이다.

 조급함이나 완벽함에 얽매이지 않고 장애가 있을 때 그를 인정하고 목표를 적절히 조정하며 정진하는 것 그리고 늘 다시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것이 바로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네 불가에서는 불식(不息)이라 하여 쉬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을 원력이라 했다. 그렇게 한걸음씩 걷다보면 어느새 좋은 습관이라는 천리(목표)에 다다르지 않을까? 지금 당장을 꾸준히 살아가는 한 걸음에 마음을 다하다 보면 하루가 충실해질 것이요, 현재의 내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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