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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펼쳐 수행을 읽다3 안녕(安寧)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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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2019.04.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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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安寧)하십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시(詩)․김춘수, 꽃 中

 불과 2~30년 전만 해도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은 방송이나 언론사가 독점하여 전달하던 뉴스가 전부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알고자 하는 욕구와 창조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언론의 뉴스보도 독점기능을 무너뜨렸다. 지구의 모든 사람 한명 한명이 일인 미디어가 되어 다양한 소식들을 전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에게 짧은 시간 안에 지구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의 뉴스와 경향들을 손쉽게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굳이 거추장스러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불과 한 시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다. 새롭게 개발되는 다양한 종류의 소셜앱은 우리나라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가진 세계인을 만나게 해준다. 그로인해 나는 세계인들과의 생각의 공통점과 차이점, 새로운 문화와 관습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문화수단인 것이다. 실로 놀라운 세상이며,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인터넷 매체나 SNS에서 새롭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를 보면 지식, 정보, 새로운 소식이나 유행 혹은 지극히 간단한 취미등과 같은 신변잡기까지의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무언가 빠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허전함인가?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그들과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마음(心)이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내가 접하고 공유하는 보통의 소식들을 곰곰이 읽다보면 알 수 있다. 평범한 일상들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일방통행의 정보나 사실들만 현란한 컴퓨터 솜씨에 의해 나열될 뿐이다. ‘보여주기’의 현주소라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사실 나열의 정보에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좋아요’도 ‘싫어요’도 모두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차원이다. 대상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의 글은 드물다. 어떤 경우는 원색적이며 공격적인 댓글이 끝을 모르고 올라온다. 공감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이나 미사여구(美辭麗句)는 바라지도 않더라도 일차원적인 표현들 즉 공격적이고 저속한 댓글이라도 없다면 다행일 것 같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불편한 감정은 느끼는 것이 비단 나뿐이겠는가! 저속한 댓글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성향이 궁금해진다.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 하는데 악플을 다는 그들은 실로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일까? 아니다. 악플을 다는 이들의 직업군과 학력, 생활수준 등을 조사해본 결과 그들은 보통의 상식을 갖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선량한 우리의 이웃이다. 그런데 왜 상식과 양심을 숨기거나 혹은 가리고 저급한 댓글과 공격적인 언사를 쉽게 표현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유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는 일상의 주변인들과는 당연하게 또 PC통신이라는 가상의 현실에서 만난 이에게 조차 수줍게 ‘안녕’, ‘방가’의 인사를 건네며 예의를 차리고 마음을 혹은 인사를 나누었다. 익명을 전제로 하는 잠깐의 대화이지만 안부를 묻는 일상의 시작이 소통의 처음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상대방과의 심적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상식적인 시작은 신뢰를 쌓게 하였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인사도 안부도 없다. 프로그램이 알아서 ‘○○님이 입장하셨습니다.’를 알려준다. 나를 밝히지도 묻지도 않는 불문율은 더욱 공고해져있다. 현실의 나조차도 가상의 공간에서는 완벽한 익명의 타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도 나도 익명이니 무엇을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상황들이 쌓여 나도 상대방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이런 성향을 반영하듯 단도직입의 일방적 글쓰기로 모든 대화가 도배되어있다. 배려와 공감, 이해의 감정 따위는 필요 없다. 생각을 거칠 필요 없이 떠오르는 모든 것이 글로 옮겨진다. 욕설과 비아냥 같은 공격적이고 저속한 말과 글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숨은그림찾기 같이 최소한의 예의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당연히 비난의 표적이 된 당사자는 일차원적 감정표현에 감정의 폭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런 감정의 폭주는 가상공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순간, 삶의 현장에서 혼란의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게임 중에 ‘못한다’는 욕설과 비난을 받은 당사자가 그 감정처리를 현실의 폭력으로 연결시키는 경우이다. 혹은 ‘욕설’을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무차별적 폭행을 가한다. 가상공간에서의 비난이 글과 감정의 악순환을 이끌어내 현실의 ‘마른하늘에 날벼락’ 폭력사건을 만든 셈이다.

걱정스러운 일은 현실과 가상의 구별을 뚜렷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상식에서 벗어난 생각과 행동들이 확장되어 나타나고 있다. 사고의 혼란이 비일비재해진다는 것이다. 더 이상 특별한 뉴스거리가 아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기분이나 상황 등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입에서 바로 내뱉는 말이,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글이 결국 ‘묻지마 폭행’이 불시에 일어나는 불안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이나 공감 혹은 배려를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을 무엇일까? 왜 우리는 평안을 묻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안녕(安寧)’에 대해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안녕하다’는 말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하다. 혹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는 뜻을 가진다. 즉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아무 탈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나누는 것은 결국 “당신의 몸과 마음은 건강하여 아무 탈이 없습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가장 근본적이면서 상식적인 배려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안녕을 묻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안부부재의 시대에 있는 것이다. 결국 서로의 안녕에 관심 없는 모두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여서 탈이 난 상태인 것이다.
앞선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기, 군사독재시절을 살아간 세대에서는 보다 엄혹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더 살뜰히 서로의 안녕을 물어보고는 했다. 이해한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가난과 고난을 그들은 겪었다. 전쟁의 아픔과 공포, 불안에 평생을 시달렸었다. 그래도 서로 간의 배려와 상식, 원칙이 존재했기에 어쩌면 사는 것이 더 힘들었을 고통의 시간들을 서로 기대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때만큼 서로의 안녕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베풀고 있을까?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현실에 적응해 살아갈 것인가? 계속 불안사회에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조금만 변화하면 가까운 미래에 혹은 다음 세대에서는 ‘안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안녕’이 시작점이 되면 어떨까? 익명을 고집하지 않는 것, 서로의 존재를 공감하고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의의 첫걸음이고 순리대로 사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수행을 통해서만 본성 찾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를 밝히는 것이 바로 큰 도(道)를 아는 것이요, 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 때 나를 밝힌다 하여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본성의 실천이라 착각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스스로를 밝히고제 뜻하는 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실 본성(本性) 혹은 도(道)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닦아지지 않은 욕심과 편견에 젖어 잘못된 생각을 본성으로 착각하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 잘못된 생각과 행동들을 하면서도 본성에 의해 이루어진 행동이라 착각하며, 그릇된 행동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여 정견(正見)과 정업(正業)등의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의 행동만이 모든 행동이 순리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용(中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仲尼曰
君子中庸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행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군자가 중용을 행하는 것은 군자로서 때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소인이 중용이랍시고 하는 일은 소인답게 아무 거리낌 없이
어영부영하는 것이다.
『중용(中庸)』 제2장 中

큰 도(道)라는 근본 원리에 기반을 둔 모든 행동들은 본성의 실천이고 『중용(中庸)』의 행이다. 이를 잘 알아 본성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여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여야 한다.
도(道)의 원칙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바로 순리에 맞는 삶일 것이고 ‘안녕’한 사회로 들어설 수 있는 첫 걸음일 것이다. 이에 한 가지 첨언을 하자면 원칙을 고수하는 한 편, 변화하는 시류에 융통성 있는 적용을 운용하는 것도 도(道)의 운용의 묘미일 것이다.
『중용』의 시중(時中)이란 어쩌면 도(道)라는 원칙을 고집하지 않는 것, 즉 본성인 도(道)를 모든 행동의 근원에 두되, 활용에 있어서 변화를 꾀함으로써 시류를 선도해 나가는 것, 즉 운용의 묘미를 갖는 융통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본성과 시중의 적절한 활용의 묘미가 생길 때 뿌리가 튼튼한 사회 즉 ‘안녕’을 중심으로 소통과 공감, 이해와 안전의 사회가 되는 것은 물론, 역동성을 갖춘 변화의 사회, 발전의 전환점을 가진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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