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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1866~1925)…좌절된 하나의 중국, 무너진 정치지도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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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5   2015.06.1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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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1866~1925)…좌절된 하나의 중국, 무너진 정치지도자의 꿈

박구재 경제에디터 goodpark@kyunghyang.com
비밀혁명 조직 결성하며 시민민주주의 혁명론 주창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은 2005년 4월 베이징을 방문한 롄잔(連戰) 전 타이완 국민당 주석과 회담을 갖기에 앞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해 각별한 의미를 담은 환영사를 발표했다.

후진타오와 롄잔 주석은 인민대회당에서 국공(國共) 수뇌회담을 갖고, 1949년 양안(兩岸) 분단 이후 56년간 계속돼 온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다. 두 최고지도자의 만남은 1945년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 회동 이후 6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지도자는 1시간 40분간의 회담을 마친 후 발표한 5개항의 언론발표문을 통해‘하나의 중국’ 원칙을 채택한 1992년 홍콩합의를 기초로 양안 간의 대화를 재개하기로 했다.

외신들은 두 지도자의 합의를 ‘제3차 국공합작’으로 불릴 만한 ‘사건’이라며 비중있게 보도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이란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 국민당이 각각 북방군벌 타도와 일본 침략 저지를 위해 맺은 두 차례의 협력관계를 말한다. 역사적 배경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후진타오와 롄잔의 적대관계 종식 선언은 ‘60년만의 국공합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외신들의 평가였다.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 국민당 사이에 ‘3차 국공회담’의 매개가 된 인물은 쑨원이다. 두 당이 전격적으로 수뇌회담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쑨원으로 상징되는 ‘공통 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타이완은 모두 쑨원을 잇는 후계 세력임을 강조하면서 그를 현대 중국의 기틀을 확립한 ‘혁명지도자’로 떠받들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이 쑨원의 혁명 업적을 잇고 있다고 자부한다. “‘쑨원의 미완성 자산계급 혁명’을 공산당이 이어받아 무산계급의 반봉건 민주혁명으로 승화시켜 완성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중국과 타이완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중국 정치지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은 1866년 중국 남부지방인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맏형 쑨메이(孫眉)를 따라 1879년 하와이로 간 쑨원은 영국계 미션스쿨에서 3년, 미국 학교인 오아후 대학에서 2년 간 공부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된다.

1883년 중국으로 돌아온 쑨원은 이듬해 홍콩으로 유학을 떠나 1885년 퀸스 칼리지에 진학한다. 부모가 정해준 여인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게 된 그는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2년 홍콩에 있는 서의서원(西醫書院·홍콩대 의학부의 전신)을 졸업한 쑨원은 잠시 개업의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혁명가의 길로 뛰어든다.

정계에 입문하기 위해 1894년 북쪽 지방으로 간 쑨원은 당시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이자 직례성(直隷省) 총독이었던 리훙장(李鴻章)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나 리훙장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쑨원은 그해 미국 하와이로 다시 건너가 훗날 비밀혁명 결사조직으로 발전한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하며 시민민주주의 혁명론을 주창한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쑨원은 고향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16년에 걸친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망명 기간 동안 일본,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지를 돌며 자금을 모은 그는 1897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는 ‘민족·민주·민생’을 내세운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창하며 지속적으로 해외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그 과정에서 난관이 적지 않았다. 수차례 중국 본토에서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과 프랑스와는 갈등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특히 일본은 그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즉시 떠나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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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이 묻혀 있는 중국 난징시 중산링(中山陵) 입구.



■위안스카이와 맺은 ‘밀실 협약’으로 중국의 분열을 막지 못해

혁명은 1911년에 이뤄졌다. 그해 청 정부는 간선철도를 모두 국유화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 같은 청의 방침은 각 지방 철도 사업자를 격분시켰고, 혁명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쓰촨성(四川省)에서 일어난 무장폭동을 효율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청 정부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1911년 10월 우한(武漢)의 혁명군이 성(省) 정부를 전복시킨 것을 계기로 다른 성에서도 정부에 대한 무력항쟁이 본격화했다. 이때부터 청 정부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쑨원은 미국 덴버에서 우한혁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 1911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난징(南京)에서 열린 대의원회의에서 임시총통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쑨원의 세력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북양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협약을 맺는다. 내전을 우려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준다. 1912년 2월 총통 직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7개월 뒤 쑨원을 전국 철도감독으로 임명한다.

역사학자들은 “쑨원이 위안스카이와 맺은 ‘밀실 협약’으로 인해 훗날 중국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쑨원의 인생역정에서 ‘최대의 오점’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 위안스카이와 맺은 ‘밀실 협약’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쑨원이 위안스카이 등과 같은 군벌세력과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면 혁명 세력 내부의 결속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당시 자신의 추종자였던 마오쩌둥과 장제스 간의 참혹한 내전을 막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계를 드러낸 쑨원의 정치력으로 인해 극좌적 사회주의와 극우적 민족주의의 분열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1913년 3월에는 동맹회를 재편, 국민당을 창당한 뒤 당수를 지낸 쑹자오런(宋敎仁)이 위안스카이의 사주를 받은 사람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협약은 깨졌고, 제2차 혁명전선이 형성됐다.

쑨원은 왕정 복고의 야욕을 드러낸 위안스카이에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피한다. 일본에서 분리정부를 세운 쑨원은 혁명동지들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할 것을 강요, 많은 혁명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게다가 쑨원은 1914년 11월 전처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비서인 쑹칭링(宋慶齡)과 결혼해 ‘도덕적으로 타락한 정치인’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쑨원은 정치적 재기를 노린다. 그는 ‘중국인을 위한 중국’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혁명조직을 재편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병사(病死)하자 쑨원은 1917년 위안스카이에 이어 베이징을 장악한 군벌들에 맞서기 위해 광둥성에 임시정부를 세운다. 하지만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원조를 얻는 데 실패하자 1917년 러시아혁명을 일으켜 집권한 소비에트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소련의 외교관인 아돌프 요페와 상하이에서 두 차례 만나 환담한 쑨원은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른바 ‘쑨원-요페 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이 성명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중국에 적합지 않으며, 소련은 중국에서 모든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1924년 초 쑨원은 소비에트 공산당의 조직을 본떠 국민당을 상명하달(上命下達)식 기강이 엄격한 조직으로 개편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은 전당대회에서 중앙 집행위원으로 3명의 공산당원을 선임했고, 군관학교 설립을 승인했다. 쑨원은 군관학교장으로 장제스를 임명한다.

쑨원은 1925년 베이징에서 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사망하기 몇 해 전부터 쑨원은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민족통일의 대의에 동참할 것을 군벌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중국은 안으로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으로 갈라져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탈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쑨원은 수십년간 ‘하나의 중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한계는 머리는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에 젖어 있고, 마음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열망했으며, 행동은 중국식 민족주의를 지향한데서 비롯됐다. 쑨원의 사체(死體)는 1929년까지 베이징 인근의 비윈사(碧雲寺)에 매장되지 않은 채 안치돼 있다가 난징으로 옮겨져 중산링(中山陵)에 매장됐다.
 

■타이완의 지폐는

타이완 지폐는 100·200·500·1000·2000원 등 5개 권종이다. 200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500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야구선수들이 환호성을 올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1000원권 앞면에는 지구본을 보는 어린이들이 그려져 있고, 최고액권인 2000원권 앞면에는 위성안테나와 중화위성 1호가 새겨져 있다. 타이완의 공식적인 화폐단위는 타이완달러(TWD)로, 1타이완달러는 우리나라 돈 34~35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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