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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잭슨(1767~1845)…‘서민대통령’ 자처한 미국판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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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2   2015.06.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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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비주류’ ‘서부’ 출신 대통령

2009년 5월 세상을 뜬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던 미국 대통령은 링컨으로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란 책을 펴내며 벤치마킹해야 할 이상적인 대통령상으로 링컨을 꼽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자주 비교되는 미국 대통령은 앤드류 잭슨이다. 앤드류 잭슨은 미국 제7대 대통령으로 1828년 테네시 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비주류 출신 대통령이었다. 잭슨은 동부 지역이 아닌 서부 지역 출신의 첫 대통령이다. 그는 또 대중을 상대로 직접 유세를 벌여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지지계층은 지식인 계층이 아닌 노동자·농민 등 서민이었다. 잭슨은 대통령 취임 때 백악관을 시민들에게 공개했는데, 미국 전역에서 온 농부와 노동자들이 연회장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잭슨은 ‘서부의 사나이’로 불리며 보통 사람들의 권익보호에 적극 나서며 자신이 ‘서민 대통령’임을 강변했다. 잭슨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미국의 대통령들은 조지 워싱턴과 그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던 제퍼슨, 제퍼슨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던 메디슨, 메디슨 밑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몬로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버지니아 주 출신이어서, 이른바 ‘버지니아왕조(Virginian Dynasty)’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 6명 중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대통령은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이다. 부자(父子) 간인 두 사람은 부시 대통령 부자의 전례로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잭슨은 전임 대통령들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1767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웩스호에서 태어난 잭슨은 어릴 적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도 있었지만 당시 고향에서의 학교 교육은 1780~178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영국군이 침공하면서 중단됐다.

어린 시절 잭슨은 영국군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는 14살 때인 1781년 형과 함께 민병대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이때 영국군 장교가 잭슨에게 군화를 닦으라고 명령한다. 잭슨은 이를 거절하면서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해달라고 요구한다. 화가 난 영국군 장교는 대검을 뽑아 휘둘렀고, 잭슨은 머리와 손에 큰 상처를 입었다. 또 잭슨의 어머니와 두 형은 영국군이 침공한 그 해에 사망했다. 이 같은 유년시절의 기억은 잭슨에게 평생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품게 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뒤 잭슨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솔즈베리에 있는 한 법률사무소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1787년 변호사 자격을 얻은 잭슨은 노스캐롤라이나 서부 지구 지방검사로 컴벌랜드 지역에 파견됐다. 지방검사로서 잭슨은 주로 채무 징수에 관한 소송 업무를 담당해 큰 성과를 거둬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쌓게 된다. 도넬슨 대령의 딸 레이첼 로바즈와 결혼한 잭슨은 1796년 테네시주의 헌법 기초위원이 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 연방 상원의원으로 뽑힌 잭슨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년 만에 사임한 뒤 테네시로 돌아와 주 상급재판소 판사로 임명돼 1804년까지 재직한다. 당시 테네시 주 민병대 소장으로 선출된 그는 1812년 남부 변경 지역을 위협하던 크리크 인디언들과 맞서 싸운다. 그가 이끌었던 민병대는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크리크 인디언들을 격파한다. 앨라배마의 토호페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잭슨이 서부 지역의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이때부터다.

잭슨은 2년 뒤인 1814년 부대를 남부 모빌로 이동시킨다. 당시 스페인 영토이던 플로리다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잭슨은 1817년 플로리다로 전격 진격해 스페인 진지 2곳을 점령한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거센 반발을 샀지만 미국이 플로리다를 자국 영토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잭슨이 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자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잭슨은 “대권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다”고 거듭 밝히며 고사했지만 지지세력들은 테네시 주의회를 설득해 그를 연방 상원 의원으로 선출한다. 이즈음 잭슨도 ‘대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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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잭슨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치고 있는 장면



■‘작은 연방정부’를 추진하며 재선에 성공···퇴임 이후 고향 내쉬빌에서 말년보내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4명의 후보를 놓고 치러졌다. 잭슨을 비롯해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크로퍼드, 헨리 클레이가 후보로 나섰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잭슨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그러나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자 하원은 다득표자 3명 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로 했다. 당시 크로퍼드가 중병을 앓게 돼 선거는 사실상 잭슨과 애덤스, 두 후보 간의 대결로 좁혀졌다.

하원 의장이었던 클레이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결국 애덤스는 1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애덤스가 당선된 후 클레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자, 잭슨 지지자들은 “애덤스와 클레이의 ‘추악한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들은 또 “잭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는 국민들의 뜻이 음모에 의해 좌절됐다”고 주장했다.

애덤스가 당선된 1824년의 대선 결과는 미국 정치사에 새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유권자들 사이에 대통령을 보통선거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게 된 것이다. 4년 뒤인 1828년 미국은 역사적인 첫 보통선거를 치르게 된다. 테네시 주는 선거가 실시되기 3년 전인 1825년 잭슨을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또다시 앤드류 잭슨과 퀸시 애덤스가 맞붙었다. 이때부터 선거운동 기간이 길어졌고, 선거포스터가 처음 등장했다. 상대 후보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방과 근거 없는 폭로가 난무했다.

위법적인 선거운동은 주로 애덤스 후보 쪽에서 자행됐다. 애덤스의 지지자들은 ‘잭슨은 살인을 18번이나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담은 포스터를 붙였다. 애덤스 지지자들이 많았던 뉴잉글랜드의 한 학교에서는 교사가 “아벨을 죽인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잭슨 장군입니다”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애덤스는 잭슨을 ‘사람 고기를 암거래하는 자’로, 잭슨 부인을 ‘간통녀’로 비방하기도 했다.

혼탁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해 대선에서 잭슨은 애덤스를 6만1000표 차로 누르고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178대 8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애덤스를 눌렀다. 잭슨의 승리는 정치권력의 중심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잭슨은 대선에서 정치조직을 활용하기보다는 유권자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민주정치의 승리로 간주됐다.

잭슨은 조지 워싱턴 이래 공직 경력이 거의 없고, 정책 입안 경험이 전무했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잭슨은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특유의 과단성을 발휘하며 각종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때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정적들은 그를 일컬어 ‘국왕 앤드루 1세’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잭슨은 183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한다. 당초 그는 재선에 뜻이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재선을 노리게 된다. 반대 진영에서는 잭슨이 주력했던 ‘작은 연방정부’ 추진 정책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나섰다. 실제로 잭슨은 연방 중앙은행의 설립 연장을 거부함으로써 거대 연방정부의 상징이던 연방은행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 과정에서 잭슨은 공화당과 동부 지역 부유층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지만 대선 공약대로 ‘작은 연방정부 만들기’에 전념했다. 잭슨은 연방 중앙은행 설립 연장안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반대파들이 워싱턴에서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시위대들이 워싱턴에 입성하면 즉시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잭슨은 1832년 재선돼 4년 간 무난하게 국정을 수행한 뒤 1837년 대통령직을 마틴 밴 뷰렌에게 넘기고 백악관을 떠났다. 그해 3월7일 잭슨이 퇴임하던 날은 유난히 화창했다.

앤드류 잭슨과 밴 뷰렌은 마차에 함께 타고 국회 의사당으로 향했다. 당시 그 광경을 지켜본 토마스 밴튼 상원의원은 “지는 태양이 떠오르는 태양을 압도했다”며 잭슨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명했다.
 

워싱턴을 떠나 기차를 타고 고향인 내쉬빌로 향하려 할 때는 퇴임하는 대통령을 보기 위해 수천명의 인파가 몰렸다. 잭슨은 기차 뒤편으로 가 모자를 벗고 백발의 긴 머리를 휘날리며 8년간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잭슨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 8년을 더 살았다.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 병상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던 잭슨은 1845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잭슨이 사망한 지 몇 시간 뒤 그의 오랜 친구였던 샘 휴스턴이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러나 휴스턴과 그의 아들은 잭슨을 임종하지 못했다. 휴스턴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국민의 벗이었던 대통령 앤드류 잭슨을 보았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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